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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읽기'에 관한 몇가지 깨달음

by 김성환 2008. 12. 28.


유진 피터슨의 책을 읽다가 '성경 읽기'에 대한 보석 같은 통찰을 하나 얻었습니다. 

'성경 읽기'는 영적인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자신의 달리기 취미를 비유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달리기에 취미를 갖게 되어 달리기를 하는 동안 달리기에 관한 여러 잡지와 책들을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잡지와 책에서 읽은 내용은 그로 하여금 더욱 달리기에 정진하게 하였으며, 달리면 달릴수록 더욱 달리기에 관한 글들을 읽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글에서 꼭 실질적인 도움을 얻어서가 아니라 달리기에 관한 그 글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달리기 행위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즐거움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상을 당해 3주간 달리기를 멈추게 되었는데 그 동안 달리기에 관한 글들도 자연스레 읽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읽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읽기'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읽는 것입니다. '성경 읽기'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요. 현실과 단절된 '성경 읽기'는 의미가 없습니다. 영적인 삶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성경 읽기'는 의미가 있어지고, 또한 성경을 읽음으로 더욱 영적인 삶에 정진하고자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성경을 읽지 않을까요? 그것은 성경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영적인 삶에 대한 갈망이 없다는 것이 더 절대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가치에 대한 눈이 떠진다면 성경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자 할 것입니다. '영적인 삶'을 멈추면 '성경 읽기'도 멈추게 됩니다. '성경 읽기'를 멈추면 '영적인 삶'도 멈추게 됩니다. 여기서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최근 아내가 '한복려를 따라하면 요리가 즐겁다'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요리책은 그 책 자체를 읽는 것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요리를 하면서 보아야 하는 책이라는 거지요. 요리를 하기 위해 읽는 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리하지 않고 그 요리책을 읽는다면 그 요리책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 사람의 배고픔은 절대 충족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 읽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나의 영적인 삶에 피와 살이 되게 하기 위해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먹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 읽기'를 위한 '성경 읽기'는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마치 특정인의 전화번호를 찾겠다는 목적 없이 그저 전화번호부를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읽는다면 결코 몇페이지 이상 전화번호부를 정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 안에 영적인 삶에 대한 갈망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영적인 삶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질 않습니다. 한번도 동굴 밖을 벗어나 본 적인 없는 박쥐가 동굴 밖의 삶을 동경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 읽기'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만큼만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읽기'와 '영적인 삶'은 상호적으로 동기부여 합니다. 


영적인 삶에 대한 참고 지도서로써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새해에도 '성경 읽기'를 작정하지만 2-3월이 되면 흐지부지하게 되기 쉽습니다. 먼저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하는 작은 다짐을 하고(혹은 그런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고...), 그것을 도와주는 '참고서'로써 성경을 읽어간다면 '성경 읽기'와 '영적인 삶'이 상호동기부여하는 시너지를 만들어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