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가모교회에
주시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분량이 많아 1부와 2부로 나누어 올리려고 합니다.
먼저 첫번째 부분을 올립니다. 두번째 부분은 우상과 음란에 관한 문제인데 피상적으로 다루고 싶지 않은 부분입니다. 공부하면서 우상숭배과 음란의 문제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사회의 음란 문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됩니다. 2부는 좀더 다듬어 조만간 올리겠습니다.
 

종이에 프린트하여 읽어보시라고 같은 내용을 워드 파일로 다운로드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아래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본문: 요한계시록 2:12-17
제목: "유물론과의 한판전쟁" (버가모교회)

 

 

이번에는 일곱교회 가운데 세번째 교회인 버가모교회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2] 버가모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13] 나는 네가 어디에 거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또 내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너희 곁 곧 사탄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14] 그러나 나는 네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자다.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16] 그러니 회개하여라.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속히 너에게로 가서, 내 입에서 나오\는 칼을 가지고 그들과 싸우겠다.

[1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고, 흰 돌도 주겠다. 그 돌에는 새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돌을 받는 사람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계 2:12-17, 새번역)

 

읽어 보셨습니까? 먼저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버가모교회에 어떠한 모습으로 계시하시는가가 나타납니다.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신 분..."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이미지로 나타나시는 걸까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먼저 버가모 도시의 상징물이 칼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버가모에 칼의 권리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버가모 도시가 자치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버가모가 로마의 중앙 집권 세력으로부터 대단한 신뢰를 얻고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버가모 도시의 상징이 칼이라고 해서 "칼로 선 자는 칼로 망하리라"고 말씀하셨던 평화의 왕께서 당신 스스로에 대해 이러한 호전적인 이미지로 계시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버가모교회가 치열한 전쟁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버가모교회가 치루고 있었던 전쟁은 총이나 칼로 싸우는 눈에 보이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버가모교회는 매우 평화로운 듯 보이는 도시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버가모 도시 안에서 버가모교회는 매우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영적 전쟁은 바로 이데올로기(Ideology)의 전쟁, 사상(Thought System)의 전쟁, 가치관(Value System)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지구상의 모든 전쟁이 생각의 전쟁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지요.지금 치루고 있는 이라크전쟁도 가치관의 전쟁이며, 한국전쟁도 이데올로기의 전쟁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역사의 모든 전쟁은 머리에서 시작됩니다. 생각이 중요한 것은 생각이 그 사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의 총합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소유한 것이 그 사람의 외적인 됨됨이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집에 사는가, 어느 차를 타고 다니는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가 그 사람의 표면적인 모습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그러한 외적 조건을 통해 그 사람의 총체적 현실(Whole Real-ity)을 판단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외적조건이 그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그 사람의 내적조건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인가입니다.

 

버가모교회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관의 전쟁을 치루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잇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 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잘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엡 6:10-13 새번역)

그러한 버가모교회에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신 분"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은 든든한 사령관의 모습으로서 너무도 적절한 이미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버가모교회가 위치한 곳은 적진의 중앙입니다.

나는 네가 어디에 거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계 2:13 새번역)

사탄의 왕좌라...

 

무슨 뜻일까요?

버가모는 지형적으로 보좌모양으로 생긴 원뿔형 돌 지반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버가모가 사탄의 왕좌라는 말씀은 그러한 버가모의 지형적 특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버가모 도시의 몇가지 문화적/종교적 특성을 살펴 보겠습니다.

도서관

버가모 하면 떠오르는 것은 먼저 훌륭한 도서관입니다. 버가모에는 예수님 당시 20만 양피지 두루마리를 소장할 정도의 대형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양피지가 처음으로 발명된 곳이 바로 버가모입니다. 양피지는 양의 가죽에 잉크로 글을 쓰는 문서작성 형태인데 이집트에서 시작된 파피루스보다 좀더 발전된 형태로서 더욱 질기고, 보관하기 쉽고, 오래 보존되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양피지(Parchment) 라는 단어 자체가 버가모(Pergamum)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양피지의 도시, 버가모, 다시 말해 버가모는 단어, 아이디어, 사상에 매료된 도시입니다. 그러한 학문 자체가 악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개인적으로 이러한 버가모의 모습은 저에게 평양의 인민대학당(미국으로 치자면 국회도서관이라고 할까요?)을 떠 올리게 합니다. 주체사상탑을 대동강 사이에 마주보며 김일성 광장 앞에 자리 잡은 인민대학당은 명실공히 북한 주체사상의 중심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곳에 북한의 주체사상이 하나의 사상체계로서 집대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직접 보면 규모 또한 엄청나지요.

 

사람들의 행동을 움직이는 것은 사상이고, 그 사상은 학문으로 체계화됩니다. 그래서 “Pen is mightier than sword.” 라는 말이 있는 것이겠지요. 역사를 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군인이 아니라 철학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체계화한 '자본론'의 칼 막스, 프랑스혁명의 주동세력이었던 계몽주의자들, 미국혁명을 이끌었던 토마스 제퍼슨, 북한의 주체사상을 체계화했다는 김일성대학의 황장엽 철학과 교수 등이 그 예이겠지요. 학문은 도구입니다. 막강한 도구입니다. 쓰임에 따라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사탄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버가모의 학문은 그러나 인민대학당이 김일성 숭배의 전당으로 전락하였듯, 시이저 숭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었습니다.

 

버가모는 유명한 시이저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BC 29년에 버가모는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해 신전을 만들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버가모 도시 뒤에 약 330미터 위로(서울의 남산 높이 만한) 보좌 모양으로 생긴 원뿔형의 언덕이 있었습니다. 그 언덕 위에 여러 신전들과 제단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두 신전이 유명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와 제우스(Zeus) 신전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치유의 신이었고 그 상징은 뱀이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제사장들은 환자 치유에 뱀을 사용하였습니다. 환자를 둔 가족들은 고통 가운데 있는 환자를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데리고 와서 밤새도록 어둠 가운데 환자를 둡니다. 그 신전 안에는 뱀들이 있습니다. 그 뱀들은 독이 없는 길들인 뱀들입니다. 그 뱀들이 지나가면서 누워있는 병자들을 만지게 됩니다.(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지요.) 그 뱀의 만짐이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만짐으로 여겨졌고 만져진 병자는 치유를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미국 FDA의 상징이 뱀이라는 사실은 바로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서 유래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로마 전역에서 아픈 사람들이 그 뱀(Serpent)의 만짐을 얻기 몰려들었습니다. 뱀을 향해 몰려드는 이미지는 우리에게 창세기 2-3장을 연상시킵니다. 성경에 의하면 뱀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하는 사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물원의 뱀이 사탄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요즘 <치유>라는 주제가 유행하는데 치유가 무엇입니까? 치유를 정의한다면 "인간의 본래 의도된 모습으로의 회복"이 아닐까요?

성경에 의하면 그 뱀은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유혹하는 옛 마귀, 즉 악한 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치유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을 앗아가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있었던 버가모를 예수님께서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 하십니다.

 

제우스 신전

그 버가모의 신전의 언덕에서 유명한 또 다른 신전은 제우스 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구원자로 여겨진 제우스 신은 그리스의 신들 가운데 가장 서열이 높은 신입니다. 800 피트 높이 위에 제우스 제단이 세워졌습니다. 그 플렛폼은 20 피트 높이에 90 스퀘어 피트로 되어 있습니다. 그 거대한 제우스 신전의 플렛폼이 도시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버가모의 모든 주민들은 문자적으로 그리고 의미적으로 그 제단의 그늘 아래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버가모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미신의 그늘 아래 살고 있었던 버가모인들의 종교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버가모는 아이디어의 중심지였고, 사람들을 진리로부터 가리우는 그릇된 학문과 미신과 문화풍조가 지배하는 도시였습니다. 정치, 의학, 종교, 문화, 경제 여러 면에서 '속이는 자'는 버가모 도시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성경 말씀을 보겠습니다. 13절입니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또 내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너희 곁 곧 사탄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버가모교회에 대한 칭찬이 나타납니다. 버가모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영이 그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고 있었습니다. 버가모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인 안디바라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지만 그들은 흔들리지 않고, 더욱 더 굳게 예수님께 의지하였습니다. 복음을 제거하려는 사탄의 노력은 마치 못을 박는 것과도 같아서 더 세게 내리 칠수록 못은 더 깊이 박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버가모교회에 예수님께서 책망하실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부에서 오는 영향에는 저항하였지만 내부에 침투한 적에 대해서는 둔감하였다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나는 네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자다.

전쟁에 있어 외부의 침략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내부의 파괴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상 항상 반복되어 온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온 예화 가운데 개구리의 교훈이 있습니다. 펄펄 끓는 물에 던져진 개구리는 냄비를 박차고 뛰쳐 나오지만 미지근한 물에 넣어져 서서히 데워지면 나른해진 개구리는 결코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사탄의 외부적인 공격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봅니다.

신사참배의 문제는 비교적 목숨을 걸고 반대하기 쉽습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이 쉽지 않지요. 그러니까 한국교회에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이 흔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외부적인 공격은 내부적인 공격에 비해 비교적 분별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교회문제에 대해 예리한 원인분석도 하고, 비판도 하고 나름대로 대안도 제시하는 것은 쉽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가 교회를 내부적으로 갉아먹고 있는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종교의 언어로 포장되어 교회 내부에 침투하는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둔감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한국 교회 내부에 만연한 개교회성장주의는 <교회 성장>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위장되어 있습니다. 배금주의는 <축복>이라는 복의 개념으로 위장되어 있구요.

신앙과 삶의 이분화를 정당화하는 현상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개신교의 대표적 교리가 든든하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성공주의, 성장주의는 최근 유행하는 긍정주의(Positive Thinking)로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지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데 토를 달기 힘들거든요. 그러나 그러한 낙관의 근거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기보다 마인드 콘트롤 차원에 그친다는데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 것이겠지요.

 

예수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선교지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보다 교회인들이 만연한 기독교사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려울지 모릅니다. 후자의 경우, 선을 긋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외부적인 핍박이 사라진 상황에서 한국교회를 더욱 치명적으로 갉아먹고 있는 것은 내부적인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가 외적 건축에 쏟을 에너지를 이제는 내면 성찰하는데 쏟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4]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15] 너희 가운데는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예수님의 책망은 내적인 공격에 둔감한 교회의 외적인 순교는 오기가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교회가 지진 대비도 중요하지만 터마이트 콘트롤도 소홀히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김성환


일곱교회 가운데 두번째 교회인 서머나교회에 주시는 메시지를 지난 며칠 동안 정리해 보았습니다. 
인쇄하시면 총 18장이 됩니다. 분량이 많아서 전처럼 이곳에 전문을 올리기가 곤란하네요. 
대신 아래 첨부파일을 클릭하셔서 다운로드 하신 후 인쇄하셔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분량이 많아서 읽기가 쉽지 않으시겠지만 저로서는 참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쁘시더라도 다른 글들은 몰라도 <요한계시록 연구>로 올리는 글들은 꼭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김성환


설교문 형식으로 쓴 장문의 글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으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워드 형식으로 작성된 아래 첨부파일을 다운로드 하셔서 프린트 해서 읽으셔도 되고 그냥 블로그에서 읽으셔도 됩니다. 첨부파일을 다운해서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내용은 같지만 첨부파일에서는 레이아웃에 좀더 신경을 썼거든요.




요한계시록 연구 (2:1-7)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에베소교회에 주시는 말씀)

 

지난 몇주 동안은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시간을 쏟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저자 요한이 쓴 또 다른 책 요한복음이 그렇듯 매우 정교하고도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글로 정리한다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 정리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이제 요한계시록 2-3장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여러분 먼저 요한계시록 2:1-7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개역개정판으로 한번, 새번역으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3장은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편지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곱 교회란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이름은 모두 그 교회들이 위치한 도시의 이름들입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라는 도시에 있는 교회이고, 사데교회는 사데라는 도시에 있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일곱교회일까요?

사실 소아시아에는 일곱 교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골로세 교회, 리스트라 교회, 더비 교회, 밀레투스 교회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일곱 교회만을 언급하는 것은 일곱이라는 숫자가 지니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일곱은 성경에서 완전수(Completeness)를 의미합니다. 예컨데 "하나님의 일곱 영"(1:5)은 문자적으로 일곱의 다른 성령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완전한 임재와 사역을 의미하는 요한의 표현기법입니다. 일곱교회란 "완전한 교회"(the complete Church)를 의미합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계시록에서 3, 4, 7, 12 등이 온전함을 의미하는 숫자인데 저마다 약간씩 다른 뉘앙스의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완전수란 대표성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곱교회에 편지를 주셨다는 것은 이 세상의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모든 교회들에게 주신 편지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곱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들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일곱교회가 지닌 이슈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교회들이 이 땅에서 겪고 갈등하는 이슈들을 총망라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교회들을 요한계시록 2-3장에 나타난 일곱교회의 상황에 비추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작업이 될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 주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왠만한 의식을 지니고 있으면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인 의미를 꿰뚫어보고, 그것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그 본질이 변질될 수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요한계시록 2-3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한계시록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작업이 우리 한국교회에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실관 (The Vision of Reality)

여기서 에베소 교회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현실관>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우리의 현실관을 변화시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은이에게 '기탄한글'이라는 한글 교재를 읽어주는데 사람 얼굴의 부위 명칭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눈, 코, 입, 귀... 사람 얼굴에서 코와 입은 하나씩이고, 눈과 귀는 두개씩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눈은 하나가 아니라 두개라는 사실이 생각해 보면 놀랍습니다. 사람의 눈은 하나일 때 Perspective를 잃게 됩니다. 한눈으로 보는 세상은 2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한쪽 눈을 가리고 보면 거리감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의 눈이 두개여서 사물을 볼 때 두 눈의 앵글의 차이가 만들어지고 그 차이가 비로소 거리감을 느끼게 합니다. 사물을 2차원이 아닌 3차원의 입체로 감지하게 되는 것은 바로 두 눈의 미세한 퍼스펙티브가 포개어질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에 와서 감사한 것 중의 하나는 제가 이중 문화 (Bi-cultural)이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를 보는 시각이 좀더 양시각 (Bi-focal)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서양)과 한국(동양)의 양쪽 문화를 접한 경험이 문화문명 전반을 보는 시각을 좀더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이러한 양시각의 관점을 우리에게 줌으로써 우리가 현실을 보는 관점이 변화되는데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한 눈으로는 이 땅의 현실을 보는 동시에 한눈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함으로써 영적 양시각을 갖게 합니다. 쉽게 말해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안경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안경'을 쓰고 보아야 현실(Real-ity)이 온전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안은 망막의 시신경에 비추어진 현실만을 보지만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보는 영안을 더하여 줍니다. 이 세상만 보아서는 온전(seeing)’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현실은 하늘의 관점과 덧포개어질 때 비로소 입체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8, 개정)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현실관이란 우리가 인생을 바라보는 안경과도 같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현실관도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하늘의 관점과 포개어지지 아니하면 불완전한 2차원적 관점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입니다.

 

한쪽 눈을 감으면 거리감을 상실하여 뛸 수도 없고, 똑바로 걸을 수도 없습니다. 두 눈의 작은 퍼스펙티브의 차이가 우리로 하여금 뛸 수 있게 하고, 똑바로 걸을 수 있게 합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현실을 바라보는 영적인 양시각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은 영적인 안과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라식 수술대 위에 실명하였던 영안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주님,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는 곧 보게 되었습니다. (눅 18:41-43a, 새번역)

 

오, 예수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서.

 

 

이제 일곱교회 가운데 첫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첫번째 교회로 언급되는 이유는 밧모섬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교회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들고 떠난 우체부가 가장 먼저 가게 될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가 첫번째 교회인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일곱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가 일곱교회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쓴 에베소서의 수신교회가 바로 이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도시의 배경

AD 96년,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시 에베소는 로마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가장 큰 도시는 로마였고, 두번째는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세번째는 시리아의 안디옥입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이곳 안디옥에서 처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우게 되지요.) 그 다음 네번째로 큰 도시가 에베소입니다. AD 96년 당시 에베소의 인구는 약 225,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에베소는 당시 명실공히 세계적인 코스모폴리탄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로스엔젤레스, 홍콩, 상해, 런던, 서울에 비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에베소는 경제중심도시였습니다. 소아시아 뿐 아니라 로마전체를 놓고 볼때도 그랬습니다. 에베소의 은행에는 막대한 자금이 유치되어 있었습니다. 아시아 서해안에서 가장 큰 항구가 바로 이곳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곳에는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져 사는 다문화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인종화된 로스엔젤레스나 다문화화되어 가는 서울 같다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되네요.)

 

에베소는 Pan Ionian Game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올림픽 다음으로 유명한 체육경기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또한 에베소에는 24,000명을 수용하는 원형극장이 있었습니다. 그레코로망(Greco-Roman) 문화의 영광이 집약된 곳입니다.

 

종교적인 면에서 볼 때, 에베소는 아르테미스라는 그리스 여신(로마인들은 아르테미스를 다이아나라고 불렀습니다.)을 어머니 신으로 섬기는 종교 중심지였습니다. 아르테미스는 생산의 여신입니다. 가슴을 드러내 놓고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는 성적 음란과 성의 여신이기도 합니다. 생산은 성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아르테미스 숭배 행위는 결과적으로 성적 음란 행위를 잉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에베소인들은 그녀를 숭배하여 성전을 짓는데 그 때 당시 그 성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였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고 합니다. 그 성전은 풋볼 구장의 두배인 10만 스퀘어 피트의 부지 위에 지어졌습니다. 100개의 대리석 돌기둥이 있었고, 기둥은 각각 55피트 높이였습니다.  

 

BC 29년에 이르러 에베소는 로마 여신 숭배의 중심지인 동시에 로마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에 순종하는 도시들에 대한 댓가로 로마는 황제숭배 신전을 짓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어느 도시가 황제 숭배 신전을 갖게 된다는 것은 로마의 문화에 대한 그 도시의 충성도와 공헌도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에베소는 그러한 특권이 여러번 주어졌습니다. BC 29년에 처음, AD 90년에 도미티안 황제 신전(나중에는 베스파시안 황제 신전으로 바뀜), 그리고 AD 190년에 헤드리안 황제 신전을 짓게 됩니다. 도미티안 황제의 신전은 8개의 돌기둥이 있었는데 기둥 하나가 자그마치 46 피트의 높이와 5피트의 지름이었다고 합니다.

 

러한 경제, 문화, 정치, 종교다원주의의 중심 도시에 그 때 당시 가장 영향력있는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에베소 교회는 사도행전에 의하면 사도 바울과 프리실라와 아굴라에 의해 개척되었습니다. 바울이 떠난 뒤, 프리실라와 아굴라가 이 교회를 맡아 양육합니다. 바울이 이 교회의 선교 전략적 위치의 중요성을 알고 나중에 돌아와 2년 반을 이곳에 머뭅니다. 사도바울이 한 교회에 머문 가장 긴 기간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지역경제에 해를 입힌다는 이유로 사도 바울은 그곳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에베소의 큰 경제 중 하나가 아르테미스/다이아나 여신의 소형 신상을 만들어 파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전도로 믿음을 가지게 되면서 더 이상 신상을 구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경제타격을 입게 된 것이지요. 신상 판매수익이 줄어들자 신상 판매 상인들을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에게 에베소 도시 밖으로 나가라고 요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주 안의 아들"이라고 부른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의 후임 목사로 세우고 떠납니다.

 

일세기 후반에 디모데는 로마에 의해 살해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의 제 3대 후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요한 목사님께서는 요한복음을 썼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시에 에베소는 크리스찬 운동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그리고 에베소로 이동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로마로 옮기게 되구요.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교회의 멤버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의탁합니다. 마리아는 요한과 함께 그 교회의 멤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에베소 교회란 얼마나 놀라운 교회입니까?

사도바울이 개척한 교회, 프리실라와 아굴라와 디모데가 양육하고, 사도 요한이 담임목사로 있었던 교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권사님으로 있었던 교회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어느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몇몇 특정 교회가 떠 오르긴 합니다.)

 

 

그런 교회에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먼저 2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요한계시록 1:9-20 말씀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첫 비전을 인용것입니다. 2:11:161:13의 인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계시록의 구조적인 문제인데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여기서 한가지만 관찰하고 넘가자면 1장에 나타난 첫번째 비전에서는 예수님께서 일곱 별(일곱 교회의 천사들을 의미, 계 1:20)을 Has, 즉 가지셨다고 묘사했는데 2:1에서는 그것을 강화하여 Hold로 바꾸었습니다. 일곱 천사들을 수중에 부리시며 교회의 삶에 적극 관심을 갖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1:13에 나타난 처음 비전에서 예수님은 “stands”였는데 2:1에서는 "walks among" 으로 바뀌었습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의미하는데(계 1:20) 일곱촛대 사이에 서 계실 뿐 아니라 걸어 다니시며 일일이 점검하시고, 관여하시는 분으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교회의 품질관리사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가 바로 교회라는 사실을 위의 두가지 관찰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 2:2에 이르러 이 유명한, 영향력 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대형 도시 교회의 교회 진단서를 제시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칭찬으로 시작하십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여기서 네 행위를 안다는 뉘앙스는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는 책망의 톤이 아닙니다. 너의 행위를 안다는 것은 너의 공헌, 실천, 성과(Achievement)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행함이 컷던 교회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자면 다양한 교회 프로그램과 사역 활동이 있었던 교회입니다. 모든 멤버들이 분주하게 제자양육, 주일 오후집회, 철야집회, 새벽집회, 수요예배, 성경공부 프로그램, 외부강사초청강연, 부흥회, 선교바자회, 교회 성장학 강의를 듣기 위해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모여드는 등등 다양한 교회 사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오해없으시길, 이러한 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좋은 취지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분주하게 일합니다.

 

"네 수고를 안다."

너의 힘들게 일함을 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는 너의 마음을 안다. 에베소 교회는 헌신하고 있고, 부지런하고, 열심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네 인내를 안다."

오랜 고난과 고통을 딛고 견딘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인내를 안다. 그들의 믿음을 위해 그들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믿음 때문에 그들에게 대적자들이 생겼습니다. 황제숭배의 압력을 인내하였고, 시이저에게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아르테미스/다이아나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하였습니다. 친구들로부터 소외되고, 사회로부터 멸시당하고, 지역사회의 고객들을 잃게 되었으며, 비지니스에도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

 

위의 사실을 3절에서 추론할 수 있습니다.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지 아니한 것을 내가 아노라."

 

놀라운 교회입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을 안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순결과 교리의 정통성을 지키는데 헌신하였습니다. 도덕과 윤리의 문제 사이에서 타협하지 않았고, 쉬운 길과 무관심의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경한 것들과 생각들이 교회 내부에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애썼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아노라. (계 2:1후반부)"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거짓 가르침을 가지고 에베소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니골라당이라고 부릅니다. (2:16)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에베소 교회가 교리의 정통성을 지키는데 헌신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분별력을 지닌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진리에 비추어보아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성숙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그들 또한 싫어하였습니다.

 

이런 에베소 교회에 무슨 부족함이 있을까요?

교회의 모습이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4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교회에 바라시는 놀라운 속내가 4절 하반부에 나타납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4)

 

천사들을 손에 쥐고 계신 분,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그 분은 교회의 참 상태를 정확히 꿰뚫고 계십니다.

에베소 교회의 모든 행위와 수고와 인내하는 아름다운 모습 이면에 에베소 교회가 중요한 것을 상실한 심각한 상임을 지적하십니다.

 

첫사랑을 버렸느니라.”

 

왜 예수님께서는 다소 감상적으로 들리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볼 수록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겪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사랑

첫사랑이란 생각해 보면 지금껏 지속적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한번도 사랑을 시작해 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는 첫사랑논할 수 없겠지요.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이영애에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는 대사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사랑이 변질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첫사랑은 예수님께서 처음 우리의 삶에 들어오셨을 때 가졌던 설레임입니다. 수양회의 마지막 날 밤 울부짖으며 만났던 예수님, 병상의 절망스런 순간에 무릎 꿇으며 만났던 예수님, 어느 공허한 밤, 말씀을 읽다가 문득 그 분의 은혜에 깊이 감동하여 헌신하기로 다짐했던 예수님, 그 예수님께 가졌던 첫사랑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문제는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정통성은 있었지만 더 이상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본질 때문에 본질을 희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인들 간의 친밀한 교제는 있었을지 모르나 예수님과의 친밀함과 애정이 사라졌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종종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하시곤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저버리고 다른 연인들과 사랑을 나눕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다룬 전형적인 책이 호세아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교회가 주님과의 첫사랑을 상실할 때 물질주의, 배금주의, 권력욕, 안락, 엔터테인먼트, 경제적 안정 등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주님에 대한 헌신의 외적인 모습은 각종 다양한 교회 행사를 통해 유지시켜 가지만 더 이상 하나님과 실질적이고도 친밀한 사랑의 관계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구약의 그러한 신랑/신부 비유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신랑되시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한계시록의 주제를 달리 정리하자면 예수님의 신부의 합당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밝히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결혼교실'인 셈이지요. 요한계시록은 마지막에 예수님과 교회의 결혼잔치로 끝맺고 있습니다.(계 19:9) 이것은 성경 전체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소아시아의 최고 대형교회였던 에베소교회에 주시는 예수님의 책망이 이것입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러분, 모두 배우자와의 첫사랑의 기억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돌이켜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었지만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그 순간을.

 

첫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즐겁게 시간을 냅니다. 모든 시간을 그와 보내기 위해 애씁니다.  

첫사랑은 그에게 귀기울이며, 어떻게 하면 그를 기쁘게 할까 골몰하는 사랑입니다.

 

첫사랑은 절대 "나 지금 바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러분은 처음 예수님과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떤 기억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고등학교 때 밤새도록 성경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 숙제하는 시간도 아깝고, 밥먹는 시간도 아까웠습니다. 성경책을 읽는 그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태복음을 읽으며 마지막 수난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처음 읽으며 뭔가 심각한 지구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에 두려움을 느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교회 가는 것이 가장 즐거웠습니다. 찬송부르는 것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실로암, 나는 순례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작은 불꽃 하나가, 나 가진 재물 없지만..."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나 주님, 저는 지금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가대 봉사하고 있는데요? 집사인데요? 장로직분을 받았는데요? 신학교에 가서 목사까지 되었는데요?

"알고 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나 주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십일조를 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세금보고도 정직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알고 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나 주님, 저는 모태신앙이며, 조상 가운데 순교자도 있고, 4대째 목회자 집안이며, 새벽기도에 매일 참석하고, 수요예배도 참석하고 있지 않습니까? 술도 끊었고, 담배도 끊었지 않습니까? 

"알고 있다. 그러나 너는 첫사랑의 그 친밀함, 열정, 관심, 설레임, 감격을 버렸느니라."

                       

 

첫사랑의 상실이 이토록 심각한 영적인 문제라면 어떻게 이런 첫사랑의 상실이 일어나게 되는 걸까요?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 교회에 나오게 되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물론 다른 불순한 동기로 나오는 분들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나고 나면 교회 안에서 인정받고 점차 지도자의 직분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서 교회 내부의 사정에 깊이 관여하게 되고 교회 정치와 정책 결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리고 서서히 교회의 본질은 상실한채 그렇게 그렇게 자신이 교회 운영에 관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데서 야릇한 쾌감을 느끼게 되고, 생활신앙이 아닌 신앙생활에 안주하며, 메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그렇게 첫사랑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것은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죽고 못살아 결혼하지만 먹고 사는데 바빠서 마누라가 파마를 했는지, 아이들이 3학년인지 4학년인지 헷갈리고, 주말이면 눕고만 싶고, 가족이 짐처럼 느껴지고, 남편은 무능한 식충이로 보이고, 아내는 살덩이 아줌마 같이 보이면서 그렇게 그렇게 첫사랑을 상실하게 됩니다.

 

 

첫사랑은 알지 못하는 사이 다른 것으로 대치되기 마련입니다.

비본질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배우자는 바람을 피우고, 교인들은 예수님이 아닌 교회놀이에 도취하게 됩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계 2:5)

회개하라는 말씀은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우리의 현상태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다른 신들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일을 숭배했으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성공과 경제 안정을 더욱 중요한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계 2:5)

처음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했던 것들을 기억하고 다시 하라는 것입니다.

결혼 관계에서 로맨스를 회복하는 방법도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신혼여행가서 찍었던 "나 잡아봐라" 사진들을 다시 꺼내 보는 것입니다. 외식도 하고, 영화도 보고, 사랑도 고백하고, 덕수궁 돌담길도 다시 찾아가 거닐어 보는 것입니다. 장미도 사고, 연애편지도 쓰고, 으슥한데 차 세워놓고 다시 뽀뽀도 해 보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너는 처음에 시시때때로 말씀 묵상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니?

너는 처음에 서투르나마 찬양하는 것을 그토록 즐기지 않았니?

너는 처음에 너무도 순수하게 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니?

너는 처음에 기도일기를 쓰는데서 기쁨을 느꼈고, 신앙도서를 읽는데서 성장하는 뿌듯함을 느끼지 않았니?

너는 처음에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애통해 하며 전도에 힘쓰지 않았니?

너는 처음에 너 자신의 삶을 스스로만의 힘으로는 지탱할 수 없음을 알고 나에게 온전히 삶을 의탁하곤 하지 않았니?

 

처음 그 사랑을 회복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외에 그 무엇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 외에 그 무엇도 예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금촛대를 옮기겠다."

 

그 분은 교회의 주인이시며 그럴 권리가 있으신 분이시기에 이 말씀이 무섭습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두려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첫사랑의 그 초심을 상실하여 실제로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교회의 촛대가 옮겨졌습니까? 교회로서의 외적인 모양은 갖추고 있는데 더 이상 어둠 가운데 빛을 발하지 못하는 있으나마나한 촛대들이 우리 주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규모나 조직이나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상실하면 그 교회는 꺼진 촛대입니다.

교회 건물의 규모와 막강한 재정상태와 많은 등록 교인들의 수와 최신 유행 교회 프로그램 등을 자랑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교회가 발하는 빛은 예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연료로 밝혀진다는 사실을.

 

첫사랑을 상실한 예배는 생명없는 형식으로 전락하며

첫사랑을 상실한 인내란 마지 못한 시간 떼우기 밖에 아니며

첫사랑을 상실한 교리의 정통성이란 냉소적인 율법주의로 변질되고 맙니다.

 

 

약속

예수님께서는 Overcome하는 자, 즉 이기는 자, 다시 말해 기억하고,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 2:7)

 

창세기 앞부분에 잠깐 조역으로 등장하였다가 무대 뒤로 사라진 생명나무가 성경 마지막 책에서 주연으로 재등장합니다. (생명나무의 깊은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살 떨리는 감동입니다. 지금은 '고종의 아침'에서 이 글을 타이프하고 있는데 팔뚝도 아파오고  배도 고파서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간단히 몇마디만 언급하겠습니다.

생명나무는 성경의 첫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에 나옵니다.

그 나무는 첫창조의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등장할 때는 새창조 하나님의 도시 새 예루살렘 중앙에 있습니다.

첫 창조에서 죄 때문에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막히고 인간들은 짐승의 가죽을(창 3:21) 뒤집어 쓰고 쫓겨납니다. 

두번째 새 창조에서는 인간의 가죽을 입고(요 1:14)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또 다른 어린 양이 피를 흘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립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최대 복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이었음을 밝히고 계십니다.

랍고 놀라워 전율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첫사랑을 회복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내용은 생명나무 다시 말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아는 성경 최고의 비밀 가운데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하노라." (창 3:22)

 

 

성경 앞부분의 이 최대 비극의 이야기 앞에 우리는 절망하고 섭섭함을 금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치 못했던 대안을 예비해 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대안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생명 열매,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자는 정녕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성찬식의 의미는 생명나무 회복예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거 생각하면 난 눈물납니다.

모든 지구인들이 이 사실 알아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 2:7, 개정)

 

Posted by 김성환


계시록의 쟝르: 묵시서, 선지서, 편지

역사적으로 요한계시록에 관하여 그릇된 해석이 많이 있어 왔습니다. 이단에 의해 잘 못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귀한 진품일수록 가짜가 많듯이 요한계시록의 보물 같은 메시지를 은폐하기 위해 원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의 마지막 책에 눈을 감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의 쟝르(Genre), 즉 문학형태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문학 형태에 따라 책을 읽는 방법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시는 시로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소설은 소설로서 읽어야 하고, 신문기사는 신문기사로서 읽어야 합니다. 시를 신문기사 읽듯 한다면 시를 올바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문기사를 소설 읽듯이 읽는다면 이 또한 잘못된 해석을 가져오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복음서를 읽는 방법과 시편을 읽는 방법은 다릅니다. 역사서를 읽는 방법과 잠언을 읽는 방법은 같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도 문학형태를 갖춘 한권의 책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도 다른 성경 65권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우리를 곤경에 빠드리거나 헷갈리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문제는 먼저 요한계시록의 문학형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데서 비롯되어야 하겠습니다.

요한은 계시록 안에서 그것이 1. 묵시(계시), 2. 선지서, 그리고 3. 편지라고 밝힙니다.
이러한 세가지 문학형태를 염두에 두고 계시록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1. 묵시문학(계시)
오늘은 먼저 묵시 문학이라는 형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시록이 묵시문학이라는 사실은 본문 1:1이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묵시 혹은 계시란 단순히 말하자면 unveiling, Disclosure, breaking through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봉하다, 뚜껑을 열다, 베일을 벗기다, 커텐을 젖힌다, 뚫고 나오다, 출현하다, 돌출하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은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커텐을 젖히다." 는 제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쓴 계시록 만이 당시 유일한 묵시문학은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서, 이사야 24-27장, 에스겔 38-39장, 스가랴 9-14장이 대표적인 묵시문학입니다. 묵시문학은 유대인들의 고유한 문학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시문학의 특성
묵시문학은 세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1. 인간이 종종 동물의 형상으로 표현됩니다. (예: 어린양, 짐승)
2. 역사적 사건들이 자연현상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예: 지진, 홍수)
3. 색깔과 숫자들이 저마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예: 3, 7, 144,000, 666, 1000)

묵시문학의 이러한 상징적인 기법들을 무시하고 상징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데서 많은 잘못된 해석이 있어왔습니다.

묵시문학의 기능 혹은 목적
그러나 묵시문학의 가장 특이한 점은 바로 묵시문학이 목적하는 그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기능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1. 앞으로 되어질 미래의 조명으로 현재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마지막 때에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되어질 미래를 봄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해방의 날이 1945년 8월 15일로 이제 곧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신사참배에 관한 한국교회의 대응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이 구체적인 날짜를 예언해 주는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곧 시련이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묵시문학의 비전은 핍박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현실을 좌우하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 것이라는 비전이 현실에 대처하는 반응을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앞으로 되어질 종말에 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2. 묵시문학의 두 기능 가운데 더욱 중요한 것은 두번째 기능입니다.
묵시문학은 현재의 보이지 않는 현실을 통해 현재의 눈에 보이는 현실을 조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묵시문학이 기본적인 전제로 삼고 있는 사실은 '현실은 눈에 보이는데로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사람의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현실 이상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묵시문학은 현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커텐을 젖히고 드러내보이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데로가 아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참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웠던 커텐을 젖혀주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들로 하여금 보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영안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견성'의 단계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여러 이미지들로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그리스/로마의 각종 신상, 여신상, 흉상, 동상, 제단, 성전 등은 그것들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로마제국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무의식 중에 주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눈에 보이는 로마제국의 이미지들은 은연 중에 보는 이들의 의식 속, 상상의 자리에 침투하여 로마의 위대함을 선전하고, 로마의 가치관에 동조할 것을 강요합니다.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의 형태로 기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지금 요한계시록을 통해 로마제국의 이미지들에 대항하는 카운터 이미지(Counter Image)를 그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이저와 쥬피터, 아폴로, 로마제국 대신, 어린 양, 생명나무, 새 예루살렘의 이미지를 그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우리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80넘은 노년의 사도 요한이 거대한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방법은 다시 말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는 세상제국의 이미지 위에 하늘의 이미지를 '덮어쓰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년의 사도요한이 눈이 멀어 제자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을 대필하게 하였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육안은 희미하여 졌으나 노년의 제자의 영안은 어느 때보다 영롱하게 맑아져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에 와서 놀라는 사실 중 하나가 이미지의 범람입니다.  IT 강국이라는 이 나라는 곳곳에 LCD 모니터가 장착되어 있어서 어느 곳에서나 시각 미디어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철을 기다리는 지하도에서, 은행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시청각 이미지는 곳곳에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각종 CF, 드라마, 광고, 홍보물, 선전물 등은 모두 단순히 물건과 브랜드를 파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 가치관을 파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청각 이미지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본주의, 소비주의, 경쟁주의, 행복, 세계화라는 이름의 미국적인 가치관, 물질주의, 맘몬주의 등이 강력한 이미지로 우리의 뇌리에 세겨지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곳곳에 정치구호가 붉은 글씨로 이미지화되어 있습니다. 반미, 김일성숭배와 주체사상을 옹호하는 이미지들이 곳곳에 타일 벽화로, 그림으로, 포스터로 북한주민들의 뇌리 속에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미지는 그들의 마음 속에 북한의 가치관, 세계관을 그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부분을 좀더 발전시켜 보고 싶습니다.)
   
사도요한은 점점 적그리스도화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격려하고자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어쩌면 요한은 단순히 논술문의 형태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직설적으로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의 메시지가 듣는 이들의 마음 깊숙이 침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존재를 궁극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로 우리의 상상의 영역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연구에 있어 현재 가장 뛰어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영국 St. Andrews 대학의 리처드 바우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번역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이 한 문장을 깨닫고 저는 눈물이 나올 뻔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Here and Now)가  '하나님의 나라'나 종말론적인 미래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현실이 아니라 "지금 여기"(Here and Now)가 '하나님의 나라 라'는 초월현실에 시간과 공간적으로 잇닿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지금 여기'가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현실로 변모되어 보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신학적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란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 그 두 현실 사이를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눈이 두개가 있어 비로소 사물에 대한 거리감이 생기고3D로 보는 입체감을 느끼게 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초현실, 즉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펼쳐 보여주는 현실을 영안으로 보게 됨으로써 온전한 현실(Reality as a whole)을 보게 됩니다. 장님 나라에서는 애꾸눈이 왕이라지만 두 눈 가진 자가 보는 현실은 애꾸눈이 보는 현실과는 한 차원 다른 풍요로운 현실입니다.

Posted by 김성환


서쪽 하늘에 짙어오는 황혼은
하늘 나라 축제의 피날레를 알리는 신호
그러나 매일 땅 위에 검은 장막이 드리워져 사람들은 잠이 듭니다.
사람들은 그 시간을 밤이라고 부릅니다.

불꽃놀이가 시작되면
불꽃이 검은 장막에 튀어 구멍이 생깁니다.
축제의 화려한 빛줄기가 구멍 사이로 세어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그 작은 불빛을 별이라고 부릅니다.


별이 사라질 날은 반드시 오고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대 초반이었습니다.
대학부 수양회 마지막날 캠프파이어를 할 때 바라본 하늘의 별에서 이 시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대학부 친구들에게 이 시를 읽어주었지만 아무도 아무런 코멘트도 없었습니다.
멋적게 자리에 앉았지만 이 시는 지금까지 제 마음 속에서 한번도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 때 썼던 내용이 원래는 조금 다릅니다.




서쪽 하늘에 짙어오는 황혼은
하늘 나라의 축제를 알리는 신호랍니다.
천사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축제를 준비하지요.
그중 시기심 많은 천사 하나가 항상 잊지 않고
사람들 사는 땅 위에 밤이라 불리우는 검은 장막을 덮어
사람들은 축제를 보지 못하고 잠을 자게 되지요.

축제가 무르익어 불꽃놀이가 시작되면
가끔 불꽃이 검은 장막에 튀어 구멍난 장막 틈으로
하늘 나라 축제의 화려한 빛줄기가 세어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구멍난 장막 틈으로 엿보이는 그 작은 불빛을
별이라고 부른답니다.



오늘 드디어 그 내용을 조금 바꾸고 마지막 줄을 첨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별이 사라질 날은 반드시 오고 있습니다."

"반드시"는 미래형 부사입니다. "반드시 올 것입니다," 라고 해야 맞겠지요. 문장 자체에 모순이 있지만 바로 이런 모순어법이야말로 장차 오실 것이며(Not Yet), 또한 현재 오고 계신(Already) '하나님의 나라'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지금까지 그 마지막 문장이 없었기에 이 시는 비극이었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요한계시록 5:4)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통해 마지막 문장을 추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새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요한계시록 5:9-10)



장막이 걷히고 하늘의 축제에 참예하게 될 날이 반드시 지금 이 순간도 오고 계십니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잠들고 싶지 않은 이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이 오고 계십니다.
장차 오고 계시는 이! 종말에 장막을 열어 젖히실 그 분의 계시를 보며 나의 눈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모두의 눈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김성환

요한계시록은 그러한 이미지 기법을 사용하여 쓰여졌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전에 주어진 지식을 전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들을 이미지 기법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함으로써 우리의 눈을 바꾸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이미지 기법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계시록의 메시지는 이미지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지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그 자체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이미지를 언어로 환원하는 형식으로는 이미지 언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미지는 이미지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미지 자체가 텍스트라는 것입니다. 이미지는 좀더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을 간접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미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언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영역을 달리합니다.

 

예를 들어 미술관을 방문할 때, 미술작품을 설명하는 해설이나 주석이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림에 관한 언어는 그 그림 자체가 소통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지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풀어 환원시키는 방법으로 메시지를 요약하려는 것은 계시록의 전달 방식(Communication Mode)를 위반하는 것입니다. (Eugene Boring)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흥미로운 사실은 요한계시록이 구약의 언어로 그림 그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신학이 구약의 이미지들로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이 보고 듣는 것을 가만히 관찰하노라면 그가 구약의 상상, 즉 구약의 렌즈를 통해 보고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계시록에 500군데가 넘는 구약의 이미지들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Posted by 김성환

이미지 기법과 상상 (Imagery and Imagination)

 

'Reversed Thunder'라는 책에서 기독교 작가, 유진 피터슨은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알려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외, 나머지 성경 65권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요한계시록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알아야 할 모든 성경의 지식들은 모세오경, 문학서, 선지서, 복음서와 서신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시록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해주고자 쓰인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진리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가르쳐 주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경험한 진리를 우리는 요한계시록 안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 새로운 방법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생생한 이미지 기법입니다. 이전에 들어 알고 있는 모든 성경의 지식을 계시록은 새로운 이미지 기법을 통해 우리의 뇌리에 각인시킵니다. 설명하고 해설하는 나열식의 논리 전개가 아닌 그림을 그리는 작업입니다.

그렇게 그려진 이미지는 우리의 지식의 창고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을 형성합니다. 상상력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상상 속에서 현실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 생생한 이미지들의 예를 몇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일곱 촛대 사이에 오른 손으로 일곱별을 들고 있는 인자 같은 이
눈이 가득한 네 생물
일곱 눈과 일곱 뿔을 가진 도살당한 것 같은 어린 양
태양으로 옷 입은 여인 붉은 용이 죽이려고 하는 어린 아이를 잉태한
또 다른 여인
붉은 짐승 위에 앉아 있는... 신성모독의 이름으로 가득한, 머리가 일곱과 일곱 머리
거룩한 도시, 어린 양의 신부,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영광을 지닌...
 

이러한 생생한 이미지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진리는 결코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지식(Information)이지만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의 깊은 곳, 즉 상상(Imagination)의 영역에 침투해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림의 형태로 우리의 상상(Imagination) 가운데 들어온 지식(Information)은 우리의 깊은 내면을 변화(Transformation)시켜나갑니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의 힘입니다. 비유적 묘사나 상징적인 은유 등과 같은 시각화된 언어가 가장 오래 뇌리에 남는 것은 그러한 언어가 우리의 상상속에 그림으로 입력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란 우리가 논술적인 언어로 표현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진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는 힘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미지와 상징은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진리를 표현해 냅니다. 이미지(Image)란 지식의 영역을 관통하여, 감정의 영역을 지나, 우리의 상상(Imagination)의 영역까지 이르러 그곳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그곳이야말로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우리의 현실(Reality)를 보는 관점(Perspective)를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치관과 행동과 감정은 바로 그곳, 상상(Imagination)의 영역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미지가 우리 눈에 입력되면 그 이미지는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감정을 유발시키며 상상력을 자극시킵니다. 이미지란 천천히 그리고 강하게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보고 듣는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사진 언어

사진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진을 일종의 소통 도구Communication Tool)라고 합니다. 사진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더 나아가 현실을 보는 틀을 전달하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한장의 사진 속에는 언어로 미치 표현하지 못하는 많은 지식(information)이 들어있는 동시에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며 더 나아가 우리의 현실관을 변화시키는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의 CF 광고들을 보십시오.

예를 들어 자동차 광고를 보면 그 자동차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그 자동차라는 상품이 뿜어내는 이미지를 시청자들의 뇌리에 그림으로 각인시키는 것이 성공적인 광고매체의 기능입니다.

 

암기기법 가운데 연상 암기법이 가장 효율적인 것이 바로 이미지 기법을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김성환

 

요한계시록은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아마도 AD 96년에 쓰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AD 92년부터 로마의 기독교 핍박은 매우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AD 65년에 네로황제에 의해 자행된 기독교인들의 핍박이 있었고 67년에는 베스파시안 황제에 의해 기독교 핍박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AD 70년에 성전을 포함한 예루살렘 도시가 로마에 의해 철저히 파괴됩니다. 이때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당하였고, 디모데도 살해당합니다.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핍박

AD 92년에 이르러 상황은 더욱 악화됩니다. 도미티안이 로마의 황제 자리에 즉위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절대권력자가 자신의 권좌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그렇다고 하지만 도미티안 황제는 특히 정서가 불안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좌를 강화하고 거대한 로마제국을 일사분란하게 통치하는 수단으로 로마제국의 모든 시민들로 하여금 황제 자신을 '주와 하나님'(Lord and God, Dominus et Deus)로 숭배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이름을 '영원한 제국'(Eternal Empire)으로, 자신의 이름은 '영원한 왕'(Everlasting King)으로 명명합니다. 로마제국과 황제의 우상화 작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모든 로마의 시민들과 권속들은 도미티안 황제의 이름으로 지어진 성전에 나아가 향을 피워 제단에 던지고 'Caesar Kurios'(Caesar is Lord) 즉 "시어저는 주다," 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사람들이 이러한 작은 예식을 행하는 한 그가 어떤 다른 종교를 갖든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종의 예배행위를 통해 도미티안 황제는 자신의 거대한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북한을 비롯하여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절대권력은 종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래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신론 문화였던 로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러한 도미티안 황제 숭배 행위는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믿는 신 외에 또 다른 한 신을 추가적으로 숭배한다고 해서 그들의 신앙양심에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에게는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시이저를 정치지도자로서 존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시이저를 '주님'으로 예배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이저를 인간으로서 존경할 수도 있지만 시이저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었습니다. 요한에게 유일한 주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목숨을 잃을 지언정 그 분 외에 다른 존재를 주로 시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절대적인 충성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시이저는 또 다른 피조인간에 불과하였습니다. 언젠가 시이저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할 때가 올 것을 요한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요한이 그의 노년에 동류 유한존재인 인간에게 머리를 숙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를 향한 숭배행위를 거부합니다. 황제와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요한의 그러한 거부 행위는 로마의 화합을 위협하는 정치적인 반역이고, '무신론자'의 행태였습니다. 요한은 다른 이들에게 선례로 남겨지면 곤란한 골치거리로 여겨집니다. 그 댓가로 요한은 밧모섬(Island of Patmos)에 유배됩니다. 그 섬은 현재 터키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10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작은 돌섬입니다. 로마정부는 밧모섬에 채석장을 만들어 정치범들을 가두고 채석 노동을 하며 일생을 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개인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사도 요한은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적은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요한계시록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언뜻 복음서에 나와 있는 진리와는 상충되는 듯 보입니다.

"때가 가까우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볼지어다, 내가 땅끝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쓰러져 가는데 과연 그것이 사실이라는 외적 증거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교회는 지하로 숨어들었습니다.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분을 떳떳이 내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예배행위는 마치 범죄행위인 듯 밀실 속에서 은밀히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흩어지고, 타협하며, 외심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사랑받는 교회의 지도자였으며 일평생을 '주님'을 위해 살았던 사도 요한은 그의 지명도 때문에 목숨만은 건졌지만 절망스럽게도 밧모섬에 갖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 채 남은 여생을 수감생활로 마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는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그러한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응답입니다. 속시원히 눈에 보이는 성과를 바라는 인간의 바램과 상식과는 달리 생생한 이미지들을 보여주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절망스러운 상황을 보는 대안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책,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주 예수여, 어디 계시나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그 분의, 그 분 방식의 답변입니다.

Posted by 김성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The Apocalypse of Jesus Christ)
(요한계시록 1:1)

요한계시록은 성경을 이루는 66권 가운데 마지막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이라는 제목은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사도 요한이 이 책을 기록한데서 그렇게 정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1을 보면 이 책의 더 정확한 제목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헬라어 원어에는 …(헬라어가 써지지 않네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는 The Apocalypse of Jesus Christ, 또는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요한계시록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라고 해야 더욱 정확할 것입니다. 1장 1절을 원어로 보면 명사로 끝날 뿐 동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계시라" 혹은 "계시입니다" 라는 표현은 한글 번역에서 추가된 것이고, 문자적으로 옮긴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라고 할 때 그 소유격 "의"는 예수 그리스도와 계시록과의 어떤 관계를 의미할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신 계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 모두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입니다.

그렇다면 계시(Apocalypse) 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계시는 '베일을 벗기다(Unveiling), 커튼을 열다, 뚜껑을 열다(disclosure), 출현하다(break through)' 등을 의미합니다. 감추인 것을 열고 드러내 나타내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요한계시록,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해 감추어졌던 것을 열고 드러내 보이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되고,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의 전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궁극적인 현실이 우리 가운데 너무도 가까이 현존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현실에 관한 책입니다. 우리는 망막의 시신경을 통해 인식되는 '보임'의 현상을 통해 저마다 현실(Reality)를 구성해 냅니다. 그렇게 고착된 현실관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세계관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비밀에 눈뜨게 합니다. 우리에게 이마와 코 사이에 위치한 두 눈 외에 또 다른 눈이 존재함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그 제 2의 눈으로 보게 되는 비가시적인 현실이 어엿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그 비가시적 현실이 요한계시록,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우리에게 다른 차원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서신서와 같이 일반적인 논술 형태의 글쓰기가 아닌 그림책 형태의 글쓰기를 사용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이해하는데 있어 참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우리의 의식 가운데 그림을 그리려고 합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묘사합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이 책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김성환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