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인데 어제 나왔습니다.

<생활신앙>이란 토랜스제일장로교회에 있을 때부터 늘 생각하는 주제입니다.


(사진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신앙생활과 생활신앙

김성환 목사 (가디나장로교회)




그리 설레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 주님 이 땅에 오신 성탄의 계절인데 말입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성탄 장식과 마음을 장악하는 연말의 소비 문화는 본질에 눈길 빼앗기지 말라고 속삭이는 마취제인듯, 침착하지 않으면 강력한 시대의 이안류(Rip Current)에 마음의 알맹이를 빼앗길 것만 같습니다. 


이 모든 성탄 축제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할 교회는 비만과 동맥경화를 앓아 호스트로서의 손님 맞이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운 듯 보입니다. 잦아드는 교회의 심장 박동에 두 손 모아 가슴을 힘껏 눌러봅니다.


잔치 자리를 떠나 조용한 곳을 찾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당신이 꿈꾸셨던 교회와 우리가 만들어가는 교회 사이의 괴리가 크지요?’ 


아직 ‘예수님의 길’이 혹독한 핍박을 받던 상황에서 ‘순교자’ 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던 저스틴은 주후 154년에 <첫번째 변증>(First Apology)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에게 핍박을 완화시켜달라는 목적으로 쓴 그 책에서 저스틴은 결론부분에 마태 22:17-21을 인용합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그는 그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것, 즉 예배, 찬양, 기도와 같은 ‘영적인 영역’은 하나님께 드리겠지만 그 외 ‘다른 모든 영역’에 관해서는 로마 황제의 통치에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니 핍박을 완화해 주소서!’ 라고.


어쩌면 이것은 2,000년 교회사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 중의 하나가 아닐른지요. 이러한 성경해석으로 인해 영과 육의 영역을 따로 구분하는 이원론이 교회 안에 은연 중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겐 무의식적으로 영과 속을 구분하는 일이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된 듯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 속으로 오신 그 예수님을 따라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울타리 밖에서는 유명무실한 채 교회 벽 안에 갖힌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이유가 혹 그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우리들만의 천국”이 되어 있는 교회를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실 것만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하면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찬양하며, 교회의 유익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떠 올립니다. 그것은 일단 아름다운 마음이지만 이제는 교회가 그 수준을 넘어서야 할 때입니다. 신앙생활을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고립시켜 구분할수록 우리는 수많은 탈(Mask)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교회용 탈, 직장용 탈, 가정용 탈… 이러한 탈 바꿔쓰기가 교회 안에 많은 탈을 낳고 있습니다. 이제 주일과 월요일 사이의 보이지 않는 구분이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넘어, 예수님의 사람들이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생활이 곧 신앙이 되는 ‘생활신앙인’이 될 때 교회의 회생은 시작되고 근육이 붙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를 꿈꿀 때 제 심장은 두근거립니다.



Posted by 김성환
2010.10.21 09:00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이 있다. 

목사도 그 중 하나다. ‘성직’이라는 이름을 붙여 굳이 이 일을 다른 직업과 구분하려는 이도 있으나 포스트 종교개혁 시대에 그런 의도는 구태의연하다.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반응의 결과물일진대 이 세상에 성직 아닌 직업이 있을까? 


나는 목사라는 직업을 택하였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예비하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고 믿는다.) 아니, 더 구체적으로 설교자가 되고자 하였다. '목사'라고 할 때 그 타이틀은 좀더 광범위한 교회 관리자로서의 의미를 내포하는 듯 하다. 나는 목사의 그러한 여러 기능 가운데 설교자로서의 기능에 끌렸다.  

설교하는 일이 나의 천직이자 순명이라고 믿고 있다. 

얼마 전 ‘남자의 자격’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며 많은 이들의 시선을 모았던 박칼린의 언론 인터뷰에서 뮤지컬 음악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직업에 대한 무한애정을 과시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인터뷰를 보며 내가 택한 설교자라는 직업은 직업으로서 어떤 매력을 지니는 걸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 울타리 안과 밖에서 비추어지는 '목사'의 이미지는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설교자는 외로운 직업이다. 온종일 기도 가운데 설교 준비와 성경공부 준비로 주어진 인생의 시간을 쏟아내야 한다. 책읽기와 글쓰기의 연속이다. 하루 이틀이 아닌, 일주일 내내, 한달 내내, 일년 내내, 죽는 날까지 그러하다. 사회, 경제, 시사, 문화, 정치 등등 인간 세상에 관련된 모든 현상에 안테나를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또한 성경에 코를 박고 살아야 한다. 설교자는 신학과 인류학의 경계에 서 있다. 하나님과 사람... 그 두 사이를 연결하는 Bridge Builder로서 설교자는 존재한다.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인가!


목사처럼 다양한 인간 삶의 현상들을 체험할 수 있는 직업이 또 있을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 순간마다 목사가 있다. 출생, 결혼, 임종, 장례... 그 순간 순간,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는 모든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목사다. 9.11이 터졌을 때 모두가 경악하여 누구 하나 말하기를 주저하였지만 세상을 향하여 유일하게 외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설교자들이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주일아침 강대상에서 선포되는 설교자들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나는 그때 확신하였다. 세상의 진정한 소망은 설교에 있다고...(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은 정치도, 경제도, 테크놀로지도, 문화도 아니다. 겉으로는 그런 듯 보이지만 말이다. 세상의 진정한 변혁자는 그 어떤 정치/경제의 거물이나 문화 아이콘도 아니다. 물론 그들의 영향력이 대단하긴 하다. 하지만 하나님 눈에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변혁자들은 중보기도자들과 설교자들이다. 중보기도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며 설교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피곤에 절어 졸고 있는 교인들일지라도 그들 앞에 성경을 펼쳐 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담대히 사자후처럼 외칠 수 있는 무명의 설교자들이야말로 빈들판 수풀 사이에 드문 드문 피어있는 약초같은 존재들이 아닐까 싶다. 설교자들이야말로 질식하는 세상에 연결된 산소호흡기요,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숨을 공급하는 인공호흡자들이다. 


그들은 일평생 재물을 모으지는 못할 것이며, 맵시 좋은 옷도 입기가 요원할 것이다. 일생 검소하게 살아야 하며좋은 집으로 옮겨가는 인생의 즐거움도 포기해야 하리라. 그러나 보라, 설교자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살아 있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아닌가! (고후 6:9-10)


감사하며, 더욱 성경의 깊은 생수물을 뜨러 나아간다. 

얕은 물에서는 볼 수 없는 어종을 깊은 물에서는 만나게 되리. 

 

이 직업에 무한자긍심을 느끼다. 




Posted by 김성환
2010.06.11 07:02

지난 가을 교회 바자회에서 꽃나무 다섯가지를 종류별로 구입하여 작은 화분에 흙을 넣고 심었다. 
교회 내방 창가에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두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잎이 무성한 잡초가 화분을 뒤덮고 있다. 
심지도 않은 잡초는 어디서 왔을까? 
성경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떠오른다. 
그러나 무엇이 잡초이며, 무엇이 알곡이란 말인가? 
그것은 나의 관점일 뿐, 하나님께서 잡초와 화초를 구분하실까?  
잡초를 뽑지 않고 두고 있다. 
질긴 생명력으로 화초를 추월하여 태양을 향해 성장하는 '잡초'를 보며 나 또한 한포기 화초이기 보다 하나님 앞에 '잡초'처럼 자라고 싶다. 

Posted by 김성환
2010.06.11 06:59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집 뒷마당에 공수부대처럼 낙하한 것들이 있어 줏어보니 날개 달린 씨앗이 아닌가!
씨앗에 날개를 달아 날려보낸 어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다. 

설교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복음의 씨앗에 날개를 달아 누군가의 마음 속에 날려보내는 것이다. 

매미의 날개를 닮은 씨앗을 보며 나도 어딘가, 누군가에게 씨앗으로 날아가고 싶다. 
 



Posted by 김성환
2010.06.09 02:17

노을 3 



이천년 동안 타온 노을이 

오늘 저녁 유난히 붉은 이유는 

마지막 반란의 유혈사태일까? 


오늘 저녁은 콩나물국


오늘 밤 

황혼이 시작될 즈음 

나팔 소리가 들려왔으면... 




1997-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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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땅에 사는 우리에게 하늘은 영적현실의 도면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에서 영적 전쟁의 유혈사태를 연상해 보았다. 

영적 현실이 가까이 펼쳐지고 있지만 콩나물국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일상은 무덤덤히 반복된다. 

그러나 재림의 나팔소리가 오늘이라도 당장 시작되었으면 하는 종말의 소망을 안고 살아간다.  

Posted by 김성환
2010.06.09 02:14


노을 2 


하늘과 땅이 결혼한다. 

수줍은 하늘은 홍조의 볼에 해 곤지 찍고 

볼그스름 땅의 품에 안겨 곤지를 감춘다. 




2001-4-23 


Posted by 김성환
2010.06.09 02:08



노을 1 

(노을과 세 친구) 


1. 

세 친구와 노을 앞에 섰다. 


2. 

나는 말했다, 노을이 붉다고. 

세 친구가 고개를 끄덕인다. 


3. 

노을이 아름다웠다. 

나는 말했다, 노을이 아름답다고. 

두 친구가 고개를 끄덕인다. 


4. 

노을을 바라보다 눈물이 흐른다. 

노을은 슬픔으로 번진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속삭여 보았다. 

한 친구가 고개를 끄덕인다. 

두 친구가 의아히 쳐다본다, 나를. 


5. 

나는 슬픈 노을을 바라본다. 

붉고 아름다운 하늘만 쳐다본다, 두 친구는. 

슬픈 나를 바라본다, 그 한 친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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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하늘이 붉다는 객관적인 사실은 모든 이가 긍정한다. 

하늘이 아름답다는 주관적인 의견은 대부분의 이가 동의한다. 

그러나 심령의 소감에 공감하는 이는 소수이다. 



Posted by 김성환
2010.06.05 20:33
어느 분이 좋은 시 한편을 이메일로 보내주셨다.  

고난은 잘 숙성시키면 훈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고난에는 의미가 있다.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그 상처를 잘 보듬어 안으면 흉한 상처도 아름다운 꽃처럼 보인다는 시인의 발상이 고맙다. 


상처에 대하여               

복효근


오래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날 내내 속 썩여 살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져도

초여름 고마리 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핀다

오래 전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 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시집<어느 대나무의 고백>  2006년
Posted by 김성환

얼마 전 우리교회의 동역자의 목사안수식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그 분의 아버님 두분이 모두 한국에서 목사님이신데 그 분들의 권면의 말씀이 좋았습니다. 
한편 부럽기도 했지요.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난, 목사가 되기 힘들었을 겁니다. 
목사라는 부류의 인간들을 무척이나 혐오하셨던 분이니까.
목사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가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많이 합니다. 요즘. 
그래서 성당에서는 신부님을 Father라고 부르는 것이겠지요. 
2003년 있었던 저의 목사 안수식을 기억하면서 목사로서의 처음 마음가짐을 돌아보았습니다. 
많이 변질되고, 게을러지고, 메너리즘에 빠져있는 요즘 내 모습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때 목사안수를 앞두고 마음 가다듬기 위해 떠났던 캐나다 밴쿠버에서 쓴 여행기를 다시 읽어 봅니다. 
아래 파일 다운로드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34페이지)  


Posted by 김성환


아버지, 저로 하여금 구도자로 살게 하소서.  


어느 곳에 있든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기 보다 먼저 하나님을 의식하게 하소서.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사려 깊고, 남을 배려하며, 행여나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인해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지 않을까 주의하는 구도자가 되게 하소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 타인이 부자가 된 것처럼 느껴지게 하며, 충고와 다그침보다는 모범과 인내로 깨달음을 주어 변화를 이끌어 내는 구도자가 되게 하소서.   


위선적인 자신의 모습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달변의 설교를 자랑하기보다는 어눌할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함에 있어 내 뜻이 개입되었음을 부끄러워하는 구도자가 되게 하소서. 


타인을 목회해야 할 대상이 아닌, 섬겨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사람을 좋아하지만 사람에 둘러쌓여 있지 않으며, 혼자 있으나 마음은 사람을 향하며, 사람 사이에 있어도 귀와 눈은 하나님을 향하는 구도자가 되게 하소서. 


Posted by 김성환
새봄을 맞아 블로그를 새롭게 단장해 보았습니다. 
푸른색은 바다가 그리운 까닭입니다. 

성경공부 준비를 위한 마태복음 읽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아래 글은 주일아침성경공부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교회소식지 "아름다운 나눔" 이번 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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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숲보기> 성경공부를 소개합니다. 


나무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숲을 이루죠. 숲 속에는 여러 나무가 있으며 그 나무는 숲 속의 다른 나무와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며 존재합니다. 나무만 보아서는 숲을 볼 수 없으며 더더구나 나무의 잎만 보아서는 나무의 군락이 이루는 웅장한 숲의 파노라마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 내의 일반적인 성경공부는 성경 66권의 책 가운데 한 권을 선정하여 성경말씀 한절 한절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는 형식입니다. 그 나름대로의 유익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성경공부는 개별적인 성경 구절이 다른 구절과, 또는 다른 성경과 갖는 연관성을 간과하게 하는 취약점이 있기도 합니다. <성경의 숲보기>를 통해 저는 성경의 한구절 한구절에 집중하기 보다는 성경 66권의 한권 한권이 갖는 특별한 문학적 구조와 신학적인 메시지에 집중하며 그 한권의 책이 전체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조화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상을 피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의 살아가는 흐름에 편승하기만 하면 되지요. 그 길은 넓고 안전해 보입니다. 그러나 고속도로 주변에서 아름다운 장관을 기대하기 어렵듯이 장엄한 풍경을 기대한다면 큰 길을 떠나 배낭을 메고 숲 속으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인적이 드문 그 숲길에서 우리는 종종 숨막히도록 장엄한 경치와 맞닥뜨리곤 합니다. ‘아, 이런 세상이 있었나!’ 남들이 보지 못한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보물은 그런 곳에 있는 법이지요. 숲 속에는 피상적인 삶이 접할 수 없는 차원의 현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겉모습만 읽어서는 절대로 접할 수 없는 현실을 보기 위해서 이런 성경공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로 숲을 거닐다보면 동굴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동굴 속으로 흙을 헤치고 들어가보면 지면의 세상과는 또다른 놀라운 현실이 존재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느낍니다. ‘아, 지금까지 살면서 내 눈에 비친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조금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이처럼 전혀 다른 차원의 현실이 존재하는 것을...!’ 그래서 저에게 성경공부 준비는 막장의 광부가 금맥을 캐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시각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귀보다 눈이 더 민감하지요. 그래서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본 것이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성경의 숲보기>를 통해 저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 성경을 그림 그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귀가 아닌 눈에 호소할까? 어떻게 하면 들려주는 말씀이 아니라 보여주는 말씀이 되게 할까?’ 한 주 내내 성경 공부를 준비하며 이것을 고민합니다.


지난 2008년 10월부터 시작한 성경의 숲보기는 2009년 11월까지 구약성경을 살펴보았고, 이제 2010년 1월부터 신약성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실제로 등산(Backpacking)이 취미인 저는 이곳 롱아일랜드의 납작한 지형에 아쉬워하는 중, 한주 한주 주일아침 <성경의 숲보기>반에 몰려든 등산객들을 이끌고 성경이라는 숲의 66그루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즐거움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성경의 숲>으로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아름다운 이 숲을 향한 작은 오솔길을 따라 함께 깊숙이 들어가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Posted by 김성환
2010.03.13 13:39


부활절을 기다리며 무참히 살해된 부산 여중생 '이 모'양의 죽음을 애도하며 쓰다.


나무 십자가의 부활

 

어느 깊은 숲에 나무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빠, 엄마, 그리고 다섯 남매.

나무 가족은 봄이 되면 따뜻한 햇살을 받아 싹을 돋고

여름이 되면 짙푸른 잎을 키우며 성장하고,

가을이 되면 알록달록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고

겨울이 되면 가족이 깊은 기도에 잠기곤 하였습니다

막내나무는 숲에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인적 드문 그곳에 나뭇꾼이 와서 막내 나무의 밑둥을 도끼로 내리치는 것이었습니다

막내는 너무나 아팠습니다

그리고 결국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광경을 바라보는 모든 나무들이 충격과 슬픔에 잠겨 말을 없었습니다

그것은 숲의 슬픔이었습니다

 

나뭇꾼은 막내나무를 꽁꽁 묶어 어디론가 끌고갔습니다

엄마, 아빠, 언니, 오빠들은 흐느끼며 광경을 지켜볼 밖에 없었습니다

후로 숲에는 계속 비가 왔습니다

 

막내나무는 너무나 두렵고 슬펐습니다

그런 막내나무를 나뭇꾼은 창고에 다른 나무들과 함께 쌓아 두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1, 2, 3

그러던 어느 , 나뭇꾼은 막내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그리곤 어느 젊은이가 막내나무를 메고 힘겹게 언덕을 오르더니 사람들이 예수라 하는 이를 막내나무에 메달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를 안고 있던 막내나무가 내려다보니 사람의 어머니와 가족들과 친구들이 그의 앞에서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막내나무는 숲에 두고 자신의 가족들이 생각났습니다

 

결국 젊은이는 막내 나무에 메달려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광경을 바라보며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충격과 슬픔에 잠겨 말을 없었습니다

막내나무는 나뭇꾼의 도끼에 쓰러졌던 자신의 모습이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예수를 어디론가 끌고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흐느끼며 광경을 지켜 밖에 없었습니다

사방이 어두워졌습니다

 

예수는 어느 무덤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 그런데 사흘째 되던 !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가족들과 친구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없는 것이었습니다

 

막내나무는 슬퍼졌습니다

, 나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이제 나를 잊었을까? 다시 그들 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막내나무의 마음 속에 불현듯 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부탁드려볼까? 아니야, 나는 예수님이 박히시는데 쓰인 십자가인걸.

그런 나를 예수님이 용서하실까?’

 

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 막내나무를 찾아오셨습니다.  

나무야, 너의 바라는 것이 무엇이니?”

, 예수님, 다시 살고 싶어요. 그리고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십자가를 등에 지시고 막내나무가 살던 숲으로 가셨습니다

그때까지 막내나무의 가족들과 숲은 하루도 막내나무를 잊어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막내나무를 그리워하며 헤어날 없는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밑둥이 잘린채 십자가가 되어 돌아온 막내나무를 바라보며 가족들은 더더욱 슬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가 막내나무를 가족들 가운데 말없이 다시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막내나무의 귀에 속삭이셨습니다

너는 다시 살아나게 될거야.”

막내나무는 예수님의 말을 믿었습니다

 

시간이 지났습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이 되었습니다

 

, 그런데 이것이 어찌 일입니까

막내나무의 몸에서 새싹이 돋고 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막내나무가 부활한 것입니다

 

아빠, 엄마, 보세요.” 

제가 다시 살아났어요.” 

 

가족들은 너무나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그것은 막내나무의 가족들 아니라 숲의 기쁨이었습니다

이제 숲의 비는 그치고 모든 나무들의 하염없는 기쁨의 눈물이 땅을 적셨습니다.    

 

후로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자신들의 팔을 번쩍 들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답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부활하신 그 분 경배하는 나무들의 찬양소리를 들어보세요.

 

Posted by 김성환


우크라이나에 단기선교를 다녀오다

(선교의 현장은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

 

 

사람들은 자신이 가 보지 못한 곳에 대해 이야기 들을 때 보통 두가지 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그곳이 평상시에 가고 싶었던 매력있는 곳이라면 귀가 솔깃해집니다. 그러나 그 곳이 평상시에 관심도, 지식도 없는 곳이라면 대개 시큰둥하지요

 

우크라이나에 다녀왔습니다!

 

라는 저의 말에 아마도 여러분의 반응은 후자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죠

이탈리아의 베니스도 아닌, 호주의 시드니도 아닌, 중국의 북경도 아닌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전 그것을 흥분된 목소리로 전합니다

 

 그곳에 가기 전, 저는 사실 그곳이 어디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 우크라이나의 옥토를 보고 탐했다는 이야기와 독일군들이 우크라이나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동사한 것이 전세 역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 정도를 얼핏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체르노빌 원전 폭파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그곳이 우크라이나였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91년도에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하였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했습니다. 지구상의 여러 나라 가운데 우크라이나 라는 공간에서도 동료피조물들이 살아왔지만 그들은 나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고 하지요? 그 땅은 저의 영적 시야를 한껏 확장시켜주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3 4일간의 말씀 집회를 했습니다. 같이 간 9명의 아름다운교회 선교팀은 환상의 드림팀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시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모두가 맡은 바 책임을 정교히 수행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초겨울의 추운 땅이었지만 내내 마음이 훈훈하였습니다

170명 남짓 사람들이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참가하였습니다. 그 중 절반은 고려인 4-5. ‘조선’족도 아닌, ‘고려’인이라니, 심정적으로는 그들이 더욱 아득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일제시대 때, 삶의 자유로운 터전을 찾아 한반도에서 북간도로 이주한 이들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고 하지요. 그들은 대한한공을 타고 기내식 비빔밥을 먹으며 삼소나이트 이민 가방에 짐을 꾸려 자발적으로 태평양을 건너 온 우리와는 사뭇 다른 고통의 이민 역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맑았습니다. 통역을 통한 설교여서 한 문장을 우크라이나어로 통역하는 동안 청중들의 반응을 좀더 여유있게 살필 수 있었습니다

강렬한 레이저 광선을 쏘여 시력이 회복되듯, 그들의 맑고도 강렬한 눈빛은 나의 마음을 회복시켜주는 영적 라식 수술이었습니다. 삶의 크고 작은 시련들을 끊임없이 겪고 살아온 초췌한 얼굴이어서 더욱 빛났던 그들의 눈빛은 은하수의 별빛처럼 초롱스러웠습니다

 

은하수를 뒤로 하고 뉴욕에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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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긴 이곳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별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뉴욕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한 주간 내내 먹구름에 비가 내렸습니다

소유의 욕망과 성공에 대한 집착, 도태의 두려움, 온갖 대결구조에 시달려 초췌한 뉴욕의 별들이 고급세단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미끄러지듯 흘러다니고 있었습니다.   

이곳으로 파송받아 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로부터

 

 

 

Posted by 김성환
2009.08.08 19:51

10년 전에 끄적여 본 글인데 다소 유치하지만 내일 주일 아침 성경공부에 쓰려고 한다. 전도서를 공부할 차례이다.
성도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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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별 이야기 4

(기독교 역사관)


(이 글에서 역사를 연극 공연에 비유할 때 우리의 삶이란 우리에게 주어지는 역할일 뿐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맡을 역할에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연극 공연이 아니라, 창조와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한 구원과 부활, 재림,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라는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즉 하나님의 계획하신 섭리 가운데 이 역사가 가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연극 공연이라는 것이다.) 



푸른 별에서는 연극이 진행되고 있었다.  

무대 한편에선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아기들이 자신의 등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미생아에게 공연의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역사>라고 한다. 


신기하다. 관중은 없고 모두가 주인공이다. 감독과 극본이 보이지 않는다. 극본 없이 어떻게 공연이 가능한지 물어보았다. 사람마다 대답이 다르다. 

극복은 연극을 제한할 뿐이기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무 이유없이 그런 것은 애초부터 없다고 하는 이도 있으며, 극본이 없는 듯 보여도 사실은 극본이 있다고 답하는 이도 소수이지만 있다. 나는 극본이 있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말에 더욱 솔깃하지 않을 수 없어 다시 물어본다. 

"그렇다면 극본을 쓴 감독이 있다는 말입니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말이 사실일까? 

푸른 별의 공연은 혼란스럽다.

과연 무대 커텐 뒤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는 둘이다. 무대 위의 사람들은 두 개의 다른 음성의 지시에 따라 연극 공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소리는 미세한 음성이며, 한 소리는 시끄러운 확성기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대부분은 확성기의 소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지만 유심히 보니 미세한 음성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연극 공연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이상한 별이다. 


그 두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때 한줄기 바람이 길게 불어 무대의 커텐이 살짝 흩날렸다. 그 순간 잠깐이었지만 나는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커텐 뒤에서 확성기를 들고 있는 그 얼굴은... 아, 그 얼굴은 바로 사탄의 얼굴이었다. 사탄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아, 바로 저것이었구나. 음성을 변조하는 기계 뒤에 서 있는 그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때로는 달콤한 목소리로... 때로는 큰 소리로... 요구하듯... 논쟁하듯... 얼르고... 협박하고... 마치 자신이 그 연극 공연의 감독인 양,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모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소리의 지시하는 것에 따라 보이지 아니하는 그 소리의 의도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죄의 증상들이 하나 둘 기정사실화되어 간다. 


그럼 또 다른 소리는...? 미세한 그 소리는 온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리는 음성이다. 그 때, 조금 전 불었던 그 바람이 또 다시 불어온다. 미세한 그 음성이 바람에 실려 나의 귀에 살며시 들려온다. 나는 그 음성에게 물어 보았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음성은 손이 되어 한곳을 가리킨다. 그리고 2000년 전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이라 하는 곳을 바라보라 한다. 무엇이 보이는가... 투박한 십자가가 꽂혀 있다. 십자가에는 불쌍하게 생긴 한 남자가 달려 있다. 음성이 말하길 그는 '사랑'이라 한다. 


"사랑이 왜 죽어야 합니까?" 


음성은 내게 알고 싶냐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자 바람은 나에게 푸른 별의 지나간 과거와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을 알려주었다. 

무대가 새롭게 보인다.


나의 눈은 십자가에서 무대로 옮겨졌다. 무대 위의 사람들은 무대 뒤의 소리에 맞추어 분주히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연극 공연이 극본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하다. 감독의 미세한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 감독에게 반역한 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들의 공연은 주제가 없다. 있다면 감독의 지시를 듣지 못하게 함으로써 공연을 망치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 틈에서 감독의 미세한 음성에 따라 움직이는 소수의 사람들이 공연하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노라니 아, 그 공연의 주제는 창조주의 구애였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였다. 

그리고 보니 창조주는 바로 그 감독이 아닌가? 



1999년 8월 25일 수요일, 20시 44분



Posted by 김성환

 

오늘 노을

 

 

이천년 동안 타온 노을

오늘 저녁 유난히 붉은 이유는

마지막 반란의 유혈사태일까

 

오늘 저녁은 콩나물국에 풋고추

 

황혼이 시작될 즈음

오늘은 나팔 소리가 들려왔으면...

 

 

 

1997-8-20 

Posted by 김성환
2009.07.20 09:12

아름다운교회에서 오늘 처음으로 새벽기도 설교를 하였습니다. 
지난 95년도에 썼던 시 한편 기억 나 올립니다. 




새벽 기도



그리움이 안개처럼 내 마음 밭을 적신다. 


잠 못 이루는 밤


바늘 구멍 만한 숨구멍을 찾아 

하나님과 호흡한다.


세상은 아직 어두운데 

내 마음 속에 연시 같은 햇덩어리가 솟아오른다.  


어둡던 내 마음 속 

빛이 있으라 하시니 

새벽이로다. 


싹트는 작은 소망들

물 주고 거름 주어 

다시금 에덴의 동산을 가꾸노라.


내 마음 속 

안개 걷히우고 

맑은 바람 불어온다.

Posted by 김성환
2009.06.12 06:21


지난 금요일 천둥이 치며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 프린스턴 신학생 네분과 바다 낚시를 갔습니다.  
오래 전부터 약속했던 거라 정작 당일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들었을 때 취소하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
낚시하는 내내 폭풍우가 쏟아지고, 남산만한 파도가 일렁여서 배에 탔던 전원 배멀미를 하고 이곳저곳에서 토하였습니다
.
낚시는 고사하고 모두들 작은 대기실에서 얼굴을 무릎에 묻고 돌아갈 시간만 기다렸습니다
.
저 또한 배낚시를 여러번 해 봤지만 이렇게 심하게 배멀미를 하기는 처음입니다
.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배멀미가 얼마나 고통스럽던지요
.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어질어질하니 말입니다.

외부를 인식하는 감각은 오감이 전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
그런데 양쪽 귀 밑 달팽이관이라는 작은 균형감각기관이 작동하지 않을 때 어지러움증을 느끼게 되는 사실은 귀한 영적 통찰을 시사합니다


달팽이관이 양쪽 귀 뒤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듣는 일에 한쪽으로 치우침이 있어서는 안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인류가 멀미를 하고 있는 이유는 지구의 공전 때문이 아니라 들어야 할 복음의 메시지가 아닌 편향된 메시지에 세뇌당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Posted by 김성환
도서관에서 페이퍼 쓰다가 골치가 아파서 읽기 시작한 시 한편인데 한국어로 번역하려니 
더 골치가 아프네요.
그래도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동부에서 참 긴 겨울을 마치고 어느덧 3월이 왔는데 도서관에서 페이퍼 쓰느라 
3월을 누리지 못하고 벌써 4월이군요. 
마지막 부분은 번역하기가 참 애매하네요. 혹시 다른 번역 아이디어가 있으신 분 계세요?

 Dear March, come in!
 How glad I am!
 I looked for you before.
 Put down your hat -
 You must have walked -
 How out of breath you are!
 Dear March, how are you?
 And the rest?
 Did you leave Nature well?
 Oh, March, come right upstairs with me,
 I have so much to tell!

 I got your letter, and the bird's;
 The maples never knew
 That you were coming, - I declare,
 How red their faces grew!
 But, March, forgive me -
 And all those hills
 You left for me to hue,
 There was no purple suitable,
 You took it all with you.

 Who knocks? that April?
 Lock the door!
 I will not be pursued!
 He stayed away a year, to call
 When I am occupied.
 But trifles look so trivial
 As soon as you have come,
 [And] blame is just as dear as praise
 And praise as mere as blame.


3월이여, 어서 들어오세요. 

오셔서 얼마나 기쁜지요.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모자를 내려놓으세요.

걸어오셨군요.

숨이 차신 것을 보니.

3월이여, 잘 지내셨어요? 다른 이들은요?

자연은 잘 있는지요?

3월이여, 어서 저와 함께 계단을 올라오세요. 

할말이 많답니다.


당신의 편지 받았어요. 보내주신 새들도. 

단풍나무들은 당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말해주었더니 얼굴이 빨개지더군요.

그러나 3월이여, 용서해 주세요.

색을 입히라고 제게 남겨주신 모든 언덕에

적절한 보랏빛을 찾을 수 없었어요. 

당신이 모두 가져가셨죠.


누가 문을 두드리는거죠? 4월이군요.

문을 잠그겠어요.

나를 찾지 못하도록.

4월은 내가 온통 당신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날 부르느라 일년을 밖에 있었지요.

그러나 당신이 오자 온갖 하찮은 것들은 더욱 사소해지고 맙니다.

원망조차 칭찬처럼 친밀하고

칭찬조차 그저 원망 같기만 합니다.



(원망과 칭찬의 경계가 모호해질 만큼 타인의 시선들이 하찮은 것이 된다는 의미일까요?)


Posted by 김성환

또 다시 한 주가 지나갑니다. 
아름다운교회에서 사역하는 즐거움이 큽니다. 
청년부 한사람 한사람 모두 너무도 귀하고 사랑스럽고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습니다.
주일 아침 성경공부 인도하는 시간이 즐겁습니다. 하고 나면 녹초가 되지만 성경공부 인도하는 시간의 보람이 큽니다.  

아내도 유년부 전도사 사역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히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교회에서 사역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공부에서 다룬 내용인데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올립니다. 
전에 영어로 설교한 적이 있는 내용이지요. (8장)

 


Posted by 김성환

사순절을 맞아 요한복음 5:1-9에 나타난 베데스다 못의 38년된 병자 이야기를 묵상하던 중, 3년 전 주일 설교를 위해 썼던 글을 조금 다듬어 올립니다. 
그 환자의 입장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쓴 편지의 형식으로 써 본 것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유치하고 어떤 부분은 너무 단순일반화시킨 면도 있지만 본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데 작은 길잡이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올려봅니다. 요한복음 5:1-9을 먼저 읽고 아래 파일을 다운받아 프린트해서 읽어보시면 되겠습니다. 5장입니다.  

Posted by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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