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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연구: 3/7 버가모교회에 주시는 말씀 (계 2:12-17) “유물론과의 한판 전쟁” 1부

by 김성환 2008. 5. 23.


버가모교회에
주시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분량이 많아 1부와 2부로 나누어 올리려고 합니다.
먼저 첫번째 부분을 올립니다. 두번째 부분은 우상과 음란에 관한 문제인데 피상적으로 다루고 싶지 않은 부분입니다. 공부하면서 우상숭배과 음란의 문제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사회의 음란 문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됩니다. 2부는 좀더 다듬어 조만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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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계시록 2:12-17
제목: "유물론과의 한판전쟁" (버가모교회)

 

 

이번에는 일곱교회 가운데 세번째 교회인 버가모교회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2] 버가모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13] 나는 네가 어디에 거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또 내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너희 곁 곧 사탄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14] 그러나 나는 네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자다.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16] 그러니 회개하여라.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속히 너에게로 가서, 내 입에서 나오\는 칼을 가지고 그들과 싸우겠다.

[1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고, 흰 돌도 주겠다. 그 돌에는 새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돌을 받는 사람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계 2:12-17, 새번역)

 

읽어 보셨습니까? 먼저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버가모교회에 어떠한 모습으로 계시하시는가가 나타납니다.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신 분..."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이미지로 나타나시는 걸까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먼저 버가모 도시의 상징물이 칼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버가모에 칼의 권리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버가모 도시가 자치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버가모가 로마의 중앙 집권 세력으로부터 대단한 신뢰를 얻고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버가모 도시의 상징이 칼이라고 해서 "칼로 선 자는 칼로 망하리라"고 말씀하셨던 평화의 왕께서 당신 스스로에 대해 이러한 호전적인 이미지로 계시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버가모교회가 치열한 전쟁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버가모교회가 치루고 있었던 전쟁은 총이나 칼로 싸우는 눈에 보이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버가모교회는 매우 평화로운 듯 보이는 도시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버가모 도시 안에서 버가모교회는 매우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영적 전쟁은 바로 이데올로기(Ideology)의 전쟁, 사상(Thought System)의 전쟁, 가치관(Value System)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지구상의 모든 전쟁이 생각의 전쟁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지요.지금 치루고 있는 이라크전쟁도 가치관의 전쟁이며, 한국전쟁도 이데올로기의 전쟁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역사의 모든 전쟁은 머리에서 시작됩니다. 생각이 중요한 것은 생각이 그 사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의 총합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소유한 것이 그 사람의 외적인 됨됨이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집에 사는가, 어느 차를 타고 다니는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가 그 사람의 표면적인 모습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그러한 외적 조건을 통해 그 사람의 총체적 현실(Whole Real-ity)을 판단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외적조건이 그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그 사람의 내적조건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인가입니다.

 

버가모교회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관의 전쟁을 치루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잇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 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잘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엡 6:10-13 새번역)

그러한 버가모교회에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신 분"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은 든든한 사령관의 모습으로서 너무도 적절한 이미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버가모교회가 위치한 곳은 적진의 중앙입니다.

나는 네가 어디에 거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계 2:13 새번역)

사탄의 왕좌라...

 

무슨 뜻일까요?

버가모는 지형적으로 보좌모양으로 생긴 원뿔형 돌 지반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버가모가 사탄의 왕좌라는 말씀은 그러한 버가모의 지형적 특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버가모 도시의 몇가지 문화적/종교적 특성을 살펴 보겠습니다.

도서관

버가모 하면 떠오르는 것은 먼저 훌륭한 도서관입니다. 버가모에는 예수님 당시 20만 양피지 두루마리를 소장할 정도의 대형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양피지가 처음으로 발명된 곳이 바로 버가모입니다. 양피지는 양의 가죽에 잉크로 글을 쓰는 문서작성 형태인데 이집트에서 시작된 파피루스보다 좀더 발전된 형태로서 더욱 질기고, 보관하기 쉽고, 오래 보존되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양피지(Parchment) 라는 단어 자체가 버가모(Pergamum)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양피지의 도시, 버가모, 다시 말해 버가모는 단어, 아이디어, 사상에 매료된 도시입니다. 그러한 학문 자체가 악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개인적으로 이러한 버가모의 모습은 저에게 평양의 인민대학당(미국으로 치자면 국회도서관이라고 할까요?)을 떠 올리게 합니다. 주체사상탑을 대동강 사이에 마주보며 김일성 광장 앞에 자리 잡은 인민대학당은 명실공히 북한 주체사상의 중심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곳에 북한의 주체사상이 하나의 사상체계로서 집대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직접 보면 규모 또한 엄청나지요.

 

사람들의 행동을 움직이는 것은 사상이고, 그 사상은 학문으로 체계화됩니다. 그래서 “Pen is mightier than sword.” 라는 말이 있는 것이겠지요. 역사를 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군인이 아니라 철학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체계화한 '자본론'의 칼 막스, 프랑스혁명의 주동세력이었던 계몽주의자들, 미국혁명을 이끌었던 토마스 제퍼슨, 북한의 주체사상을 체계화했다는 김일성대학의 황장엽 철학과 교수 등이 그 예이겠지요. 학문은 도구입니다. 막강한 도구입니다. 쓰임에 따라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사탄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버가모의 학문은 그러나 인민대학당이 김일성 숭배의 전당으로 전락하였듯, 시이저 숭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었습니다.

 

버가모는 유명한 시이저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BC 29년에 버가모는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해 신전을 만들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버가모 도시 뒤에 약 330미터 위로(서울의 남산 높이 만한) 보좌 모양으로 생긴 원뿔형의 언덕이 있었습니다. 그 언덕 위에 여러 신전들과 제단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두 신전이 유명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와 제우스(Zeus) 신전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치유의 신이었고 그 상징은 뱀이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제사장들은 환자 치유에 뱀을 사용하였습니다. 환자를 둔 가족들은 고통 가운데 있는 환자를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데리고 와서 밤새도록 어둠 가운데 환자를 둡니다. 그 신전 안에는 뱀들이 있습니다. 그 뱀들은 독이 없는 길들인 뱀들입니다. 그 뱀들이 지나가면서 누워있는 병자들을 만지게 됩니다.(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지요.) 그 뱀의 만짐이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만짐으로 여겨졌고 만져진 병자는 치유를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미국 FDA의 상징이 뱀이라는 사실은 바로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서 유래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로마 전역에서 아픈 사람들이 그 뱀(Serpent)의 만짐을 얻기 몰려들었습니다. 뱀을 향해 몰려드는 이미지는 우리에게 창세기 2-3장을 연상시킵니다. 성경에 의하면 뱀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하는 사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물원의 뱀이 사탄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요즘 <치유>라는 주제가 유행하는데 치유가 무엇입니까? 치유를 정의한다면 "인간의 본래 의도된 모습으로의 회복"이 아닐까요?

성경에 의하면 그 뱀은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유혹하는 옛 마귀, 즉 악한 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치유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을 앗아가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있었던 버가모를 예수님께서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 하십니다.

 

제우스 신전

그 버가모의 신전의 언덕에서 유명한 또 다른 신전은 제우스 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구원자로 여겨진 제우스 신은 그리스의 신들 가운데 가장 서열이 높은 신입니다. 800 피트 높이 위에 제우스 제단이 세워졌습니다. 그 플렛폼은 20 피트 높이에 90 스퀘어 피트로 되어 있습니다. 그 거대한 제우스 신전의 플렛폼이 도시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버가모의 모든 주민들은 문자적으로 그리고 의미적으로 그 제단의 그늘 아래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버가모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미신의 그늘 아래 살고 있었던 버가모인들의 종교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버가모는 아이디어의 중심지였고, 사람들을 진리로부터 가리우는 그릇된 학문과 미신과 문화풍조가 지배하는 도시였습니다. 정치, 의학, 종교, 문화, 경제 여러 면에서 '속이는 자'는 버가모 도시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성경 말씀을 보겠습니다. 13절입니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또 내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너희 곁 곧 사탄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버가모교회에 대한 칭찬이 나타납니다. 버가모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영이 그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고 있었습니다. 버가모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인 안디바라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지만 그들은 흔들리지 않고, 더욱 더 굳게 예수님께 의지하였습니다. 복음을 제거하려는 사탄의 노력은 마치 못을 박는 것과도 같아서 더 세게 내리 칠수록 못은 더 깊이 박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버가모교회에 예수님께서 책망하실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부에서 오는 영향에는 저항하였지만 내부에 침투한 적에 대해서는 둔감하였다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나는 네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자다.

전쟁에 있어 외부의 침략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내부의 파괴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상 항상 반복되어 온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온 예화 가운데 개구리의 교훈이 있습니다. 펄펄 끓는 물에 던져진 개구리는 냄비를 박차고 뛰쳐 나오지만 미지근한 물에 넣어져 서서히 데워지면 나른해진 개구리는 결코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사탄의 외부적인 공격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봅니다.

신사참배의 문제는 비교적 목숨을 걸고 반대하기 쉽습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이 쉽지 않지요. 그러니까 한국교회에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이 흔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외부적인 공격은 내부적인 공격에 비해 비교적 분별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교회문제에 대해 예리한 원인분석도 하고, 비판도 하고 나름대로 대안도 제시하는 것은 쉽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가 교회를 내부적으로 갉아먹고 있는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종교의 언어로 포장되어 교회 내부에 침투하는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둔감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한국 교회 내부에 만연한 개교회성장주의는 <교회 성장>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위장되어 있습니다. 배금주의는 <축복>이라는 복의 개념으로 위장되어 있구요.

신앙과 삶의 이분화를 정당화하는 현상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개신교의 대표적 교리가 든든하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성공주의, 성장주의는 최근 유행하는 긍정주의(Positive Thinking)로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지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데 토를 달기 힘들거든요. 그러나 그러한 낙관의 근거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기보다 마인드 콘트롤 차원에 그친다는데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 것이겠지요.

 

예수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선교지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보다 교회인들이 만연한 기독교사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려울지 모릅니다. 후자의 경우, 선을 긋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외부적인 핍박이 사라진 상황에서 한국교회를 더욱 치명적으로 갉아먹고 있는 것은 내부적인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가 외적 건축에 쏟을 에너지를 이제는 내면 성찰하는데 쏟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4]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15] 너희 가운데는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예수님의 책망은 내적인 공격에 둔감한 교회의 외적인 순교는 오기가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교회가 지진 대비도 중요하지만 터마이트 콘트롤도 소홀히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