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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연구 (5): 계시록의 쟝르 ( 묵시서, 선지서, 편지)

by 김성환 2008. 3. 11.


계시록의 쟝르: 묵시서, 선지서, 편지

역사적으로 요한계시록에 관하여 그릇된 해석이 많이 있어 왔습니다. 이단에 의해 잘 못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귀한 진품일수록 가짜가 많듯이 요한계시록의 보물 같은 메시지를 은폐하기 위해 원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의 마지막 책에 눈을 감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의 쟝르(Genre), 즉 문학형태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문학 형태에 따라 책을 읽는 방법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시는 시로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소설은 소설로서 읽어야 하고, 신문기사는 신문기사로서 읽어야 합니다. 시를 신문기사 읽듯 한다면 시를 올바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문기사를 소설 읽듯이 읽는다면 이 또한 잘못된 해석을 가져오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복음서를 읽는 방법과 시편을 읽는 방법은 다릅니다. 역사서를 읽는 방법과 잠언을 읽는 방법은 같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도 문학형태를 갖춘 한권의 책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도 다른 성경 65권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우리를 곤경에 빠드리거나 헷갈리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문제는 먼저 요한계시록의 문학형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데서 비롯되어야 하겠습니다.

요한은 계시록 안에서 그것이 1. 묵시(계시), 2. 선지서, 그리고 3. 편지라고 밝힙니다.
이러한 세가지 문학형태를 염두에 두고 계시록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1. 묵시문학(계시)
오늘은 먼저 묵시 문학이라는 형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시록이 묵시문학이라는 사실은 본문 1:1이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묵시 혹은 계시란 단순히 말하자면 unveiling, Disclosure, breaking through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봉하다, 뚜껑을 열다, 베일을 벗기다, 커텐을 젖힌다, 뚫고 나오다, 출현하다, 돌출하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은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커텐을 젖히다." 는 제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쓴 계시록 만이 당시 유일한 묵시문학은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서, 이사야 24-27장, 에스겔 38-39장, 스가랴 9-14장이 대표적인 묵시문학입니다. 묵시문학은 유대인들의 고유한 문학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시문학의 특성
묵시문학은 세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1. 인간이 종종 동물의 형상으로 표현됩니다. (예: 어린양, 짐승)
2. 역사적 사건들이 자연현상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예: 지진, 홍수)
3. 색깔과 숫자들이 저마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예: 3, 7, 144,000, 666, 1000)

묵시문학의 이러한 상징적인 기법들을 무시하고 상징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데서 많은 잘못된 해석이 있어왔습니다.

묵시문학의 기능 혹은 목적
그러나 묵시문학의 가장 특이한 점은 바로 묵시문학이 목적하는 그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기능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1. 앞으로 되어질 미래의 조명으로 현재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마지막 때에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되어질 미래를 봄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해방의 날이 1945년 8월 15일로 이제 곧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신사참배에 관한 한국교회의 대응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이 구체적인 날짜를 예언해 주는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곧 시련이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묵시문학의 비전은 핍박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현실을 좌우하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 것이라는 비전이 현실에 대처하는 반응을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앞으로 되어질 종말에 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2. 묵시문학의 두 기능 가운데 더욱 중요한 것은 두번째 기능입니다.
묵시문학은 현재의 보이지 않는 현실을 통해 현재의 눈에 보이는 현실을 조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묵시문학이 기본적인 전제로 삼고 있는 사실은 '현실은 눈에 보이는데로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사람의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현실 이상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묵시문학은 현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커텐을 젖히고 드러내보이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데로가 아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참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웠던 커텐을 젖혀주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들로 하여금 보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영안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견성'의 단계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여러 이미지들로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그리스/로마의 각종 신상, 여신상, 흉상, 동상, 제단, 성전 등은 그것들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로마제국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무의식 중에 주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눈에 보이는 로마제국의 이미지들은 은연 중에 보는 이들의 의식 속, 상상의 자리에 침투하여 로마의 위대함을 선전하고, 로마의 가치관에 동조할 것을 강요합니다.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의 형태로 기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지금 요한계시록을 통해 로마제국의 이미지들에 대항하는 카운터 이미지(Counter Image)를 그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이저와 쥬피터, 아폴로, 로마제국 대신, 어린 양, 생명나무, 새 예루살렘의 이미지를 그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우리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80넘은 노년의 사도 요한이 거대한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방법은 다시 말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는 세상제국의 이미지 위에 하늘의 이미지를 '덮어쓰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년의 사도요한이 눈이 멀어 제자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을 대필하게 하였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육안은 희미하여 졌으나 노년의 제자의 영안은 어느 때보다 영롱하게 맑아져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에 와서 놀라는 사실 중 하나가 이미지의 범람입니다.  IT 강국이라는 이 나라는 곳곳에 LCD 모니터가 장착되어 있어서 어느 곳에서나 시각 미디어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철을 기다리는 지하도에서, 은행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시청각 이미지는 곳곳에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각종 CF, 드라마, 광고, 홍보물, 선전물 등은 모두 단순히 물건과 브랜드를 파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 가치관을 파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청각 이미지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본주의, 소비주의, 경쟁주의, 행복, 세계화라는 이름의 미국적인 가치관, 물질주의, 맘몬주의 등이 강력한 이미지로 우리의 뇌리에 세겨지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곳곳에 정치구호가 붉은 글씨로 이미지화되어 있습니다. 반미, 김일성숭배와 주체사상을 옹호하는 이미지들이 곳곳에 타일 벽화로, 그림으로, 포스터로 북한주민들의 뇌리 속에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미지는 그들의 마음 속에 북한의 가치관, 세계관을 그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부분을 좀더 발전시켜 보고 싶습니다.)
   
사도요한은 점점 적그리스도화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격려하고자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어쩌면 요한은 단순히 논술문의 형태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직설적으로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의 메시지가 듣는 이들의 마음 깊숙이 침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존재를 궁극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로 우리의 상상의 영역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연구에 있어 현재 가장 뛰어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영국 St. Andrews 대학의 리처드 바우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번역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이 한 문장을 깨닫고 저는 눈물이 나올 뻔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Here and Now)가  '하나님의 나라'나 종말론적인 미래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현실이 아니라 "지금 여기"(Here and Now)가 '하나님의 나라 라'는 초월현실에 시간과 공간적으로 잇닿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지금 여기'가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현실로 변모되어 보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신학적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란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 그 두 현실 사이를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눈이 두개가 있어 비로소 사물에 대한 거리감이 생기고3D로 보는 입체감을 느끼게 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초현실, 즉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펼쳐 보여주는 현실을 영안으로 보게 됨으로써 온전한 현실(Reality as a whole)을 보게 됩니다. 장님 나라에서는 애꾸눈이 왕이라지만 두 눈 가진 자가 보는 현실은 애꾸눈이 보는 현실과는 한 차원 다른 풍요로운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