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3.01.22 출감 (2)
  2. 2013.01.16 서영이와 서은이 최근 사진
  3. 2013.01.09 작업 공간 (12)
  4. 2013.01.09 1월 7일 (5)
  5. 2013.01.05 교회 창고 문짝 고치기
  6. 2013.01.04 신앙생활과 생활신앙 (한국일보 기고글)

Martin Luther King Jr. Day에 어느 흑인 한사람과 몇시간 가량 교제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1982년, 22살의 나이에 술집에서 백인을 총으로 살해하고 2급 살인죄로 실형을 선고 받아 로스앤젤레스 감옥에서 30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작년에 52세의 나이로 자유의 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최근 감명깊게 본 영화 "Life of Pi"에서 주인공의 놀라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작가와 같은 심정으로 그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존재감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작년 한해 내 마음을 먹먹하게 했고, 지금은 수감생활 중인 Mattthew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30년의 수감생활이라... 나로서는 그러한 삶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와 이야기 나누며 묶여 있다는 것의 아픔에 대해 생각했고,
수감생활 중인 인류와 십자가를 통한 자유를 생각했습니다.

특정 파라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수감생활과 관습, 율법, 타인들의 기대에 묶인 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수감생활을 생각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계셔서 감사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세례 요한처럼 내 영혼도 자유롭기를...



싯가 500불이 넘는 버버리 코트를 쓰레기 통에 던져 넣었습니다. 나 답지 않게 여겨져 한번도 입지 않으며 3년째 가지고만 있었던 코트였습니다. 버리고 나니 내 마음 속에 하늘을 담을 용량이 늘어났습니다.

버린 만큼 자유로워지는 걸.


Posted by 김성환

아빠가 설교할 때 저런단다.







Posted by 김성환

작은 공간이라도 나만의 창작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은채 마음껏 그림도 그리고, 작은 목공소품도 만들고, 도자기도 구울 수 있는 그런 곳.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과정이 공개되지 않을 수 있는 곳.


나는 사람들의 작업공간에 관심이 많다.

특히 창조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공간.


창작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목적을 향해 모든 것이 배치된 공간, 

관록과 연륜이 느껴지는 도구들.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기능에 충실한  손때 묻은 오브제들...


화가의 붓과 팔레트, 

작가의 책상과 필기도구,

목수의 줄자와 망치,

도공의 물레는 눈물 겹도록 아름답고 경이롭다.



설교자도 그런 부류에 포함될 수 있기를...


설교자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은 보이지 않는 영적 진리의 가시화된 코드라고 보기 때문이다.

코드를 해독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팔레트나 줄자가 아닌 눈빛을 예리하게 정비하고 심화시킨다. 

몸이 도구인 설교자는 온 세상을 작업 공간으로 삼는다.


넓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금속탐지기를 들고 뭔가는 찾는 이의 모습 속에서 설교자의 모습을 본다.


먼 훗날, 

나만의 작업공간이 생긴다면 지붕에는 에코 텃밭을 가꾸고, 가을 하늘을 닮은 푸른 색으로 벽을 페인트하고, 주홍 빛 담쟁이 덩굴을 심고, 해바라기와 대나무를 심으리라. 


장작을 때는 작은 화로 난로를 만들어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뜨거운 콜롬비아 커피를 내 놓으리라.

 


Posted by 김성환
2013년이 시작된지 벌써 7일째다.

특별새벽기도 기간인데 감기가 심하다.
그래서인지 생각이 희미하고 계속 콧물이 난다.

2013년에는 생존하지 않고 살고 싶다.
그래서 가방을 하나 샀고, 아이패드를 샀으며 작은 노트와 필기도구를 준비했다.
어디서든지 글을 쓸 수 있도록.

올 한해는 공부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역사책과 전기, 소설, 수필, 여행기... 등등 다양한 읽을 거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리고 사람이 목적이 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성탄의 계절에 성탄카드를 보내지는 못했지만 연락이 끊겼던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안부를 묻는다.
페이스북은 왠지 마음에 내키지 않아 블로그에 좀더 글을 열심히 써서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한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불특정 다수가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온라인상에서 솔직한 속내를 이야기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지혜롭지도 않다.
하지만 구도자의 글쓰기는 남을 가르치거나 강요하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나누고, 함께 길을 모색하기 위한 글쓰기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줄 한줄 써보도록 하자.

표현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곳에 댓글 남겨주는 사람들이 난 참 고맙다.

교회는 많은 새교우들이 오셔서 한주 한주가 다른 분위기다. 감사한 일이다.
양적성장을 지향하지 않는다고 설교하면서 새교우들이 오셔서 설레이는 이 마음은 도대체 뭘까.

<훈련과 성장>의 한해가 되자고 신년주일예배 때 설교했다.
앞으로 교회 웹사이트가 gpclove.com으로 바뀐다.
따라서 설교 동영상과 설교 원고도 새로운 주소로 옮겨질 예정이다.


이제 담임목회 3년차에 접어든다.
지난 2년간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일까?
교회에 많은 것을 쏟아붓고 나서 옆을 보니 아내의 머리에는 어느새 새치가 무성하고, 서영이 이마엔 여드름이 가득이고, 서은이는 더 이상 아빠와 뽀뽀하지 않는다.

멀어져 가는 것들에 너무 연연하지 말도록 하자.
소진되는 체력, 흐려지는 집중력 앞에 너무 우울해하지 말도록 하자.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실 분은 누구인가.
다른 어떤 스위치도 눌렀을 때 불이 켜지지 않는다.
다만 예수라는 스위치는 누를 때마다 예외없이 내 마음 속에 불을 켜곤 하니 시선을 고정시킬 수 밖에.


내일이면 1월하고도 여드레다.

Posted by 김성환

지난 해, 강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철문이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곳을 기도실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Posted by 김성환


연말에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인데 어제 나왔습니다.

<생활신앙>이란 토랜스제일장로교회에 있을 때부터 늘 생각하는 주제입니다.


(사진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신앙생활과 생활신앙

김성환 목사 (가디나장로교회)




그리 설레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 주님 이 땅에 오신 성탄의 계절인데 말입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성탄 장식과 마음을 장악하는 연말의 소비 문화는 본질에 눈길 빼앗기지 말라고 속삭이는 마취제인듯, 침착하지 않으면 강력한 시대의 이안류(Rip Current)에 마음의 알맹이를 빼앗길 것만 같습니다. 


이 모든 성탄 축제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할 교회는 비만과 동맥경화를 앓아 호스트로서의 손님 맞이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운 듯 보입니다. 잦아드는 교회의 심장 박동에 두 손 모아 가슴을 힘껏 눌러봅니다.


잔치 자리를 떠나 조용한 곳을 찾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당신이 꿈꾸셨던 교회와 우리가 만들어가는 교회 사이의 괴리가 크지요?’ 


아직 ‘예수님의 길’이 혹독한 핍박을 받던 상황에서 ‘순교자’ 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던 저스틴은 주후 154년에 <첫번째 변증>(First Apology)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에게 핍박을 완화시켜달라는 목적으로 쓴 그 책에서 저스틴은 결론부분에 마태 22:17-21을 인용합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그는 그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것, 즉 예배, 찬양, 기도와 같은 ‘영적인 영역’은 하나님께 드리겠지만 그 외 ‘다른 모든 영역’에 관해서는 로마 황제의 통치에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니 핍박을 완화해 주소서!’ 라고.


어쩌면 이것은 2,000년 교회사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 중의 하나가 아닐른지요. 이러한 성경해석으로 인해 영과 육의 영역을 따로 구분하는 이원론이 교회 안에 은연 중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겐 무의식적으로 영과 속을 구분하는 일이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된 듯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 속으로 오신 그 예수님을 따라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울타리 밖에서는 유명무실한 채 교회 벽 안에 갖힌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이유가 혹 그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우리들만의 천국”이 되어 있는 교회를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실 것만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하면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찬양하며, 교회의 유익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떠 올립니다. 그것은 일단 아름다운 마음이지만 이제는 교회가 그 수준을 넘어서야 할 때입니다. 신앙생활을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고립시켜 구분할수록 우리는 수많은 탈(Mask)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교회용 탈, 직장용 탈, 가정용 탈… 이러한 탈 바꿔쓰기가 교회 안에 많은 탈을 낳고 있습니다. 이제 주일과 월요일 사이의 보이지 않는 구분이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넘어, 예수님의 사람들이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생활이 곧 신앙이 되는 ‘생활신앙인’이 될 때 교회의 회생은 시작되고 근육이 붙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를 꿈꿀 때 제 심장은 두근거립니다.



Posted by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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