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은 잘 마쳤습니다. 아름다운 결혼식이었습니다.
한국 결혼식 참 재미있더군요. 서울대생이라 공부만 하고 재미 모르는 학생일 줄로 편견 가졌는데 친구들도 그렇고 성실하고 재미있는 청년들이었습니다.
또한 많은 친척분들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내가 한국에 친척들이 엄청 많더군요.
미국살면서 친척이란 걸 모르고 살았습니다.
친척분들마다 하시는 말씀이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가 인물이 그리 좋았었다는 말씀과 할아버지 할머니께 신세를 많이 졌다는 말씀들을 이구동성으로 하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강원도 삼척에서 친척들 가운데 일차로 서울 신촌에 올라온 저희 집을 많은 친척들이 전초기지 삼아 상경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저희 집은 항상 여관 같았지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고,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들이 몇달 몇년씩 우리 집에 상주하며 생활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손이 커서 다 먹여키우셨지요. 스님들도 우리 집에 오면 할머니께서 한 됫박으로 퍼주셨기 때문에 우리 집에 스님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었고, 김장철이 되면 몇백포기를 담가다가 동네사람들 다 나누어주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성환이네 김장하는 날이 동네잔칫날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김장날이면 동네 아줌마들 20명 정도가 우리 집에 와서 김장 담가주고 김치 가져가던 기억납니다.
커서 생각해보니 며느리였던 우리 어머니가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 같은 아들을 두셨잖우?
그렇게 우리집에서 무상으로 하숙하며 공부하신 친척분들이 차병원 의사도 되고, 카이스트 교수도 되어 나보고 감사하다고 하니 우쭐합니다. 그런데 나도 어렸을 때 그분들 우리집에서 대학공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부모가 잘못하면 삼대가 벌을 받고 잘하면 삼대가 축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립습니다.
할아버지는 강원도 씨름 장사셨다고 합니다. 3년 연속 황소를 타오셔서 그 뒤에는 일부러 대회에 나가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기골이 장대했던 할아버지 기억 납니다. 전국체전에서 고등학교 때 레슬링으로 은메달을 따셨던 아버지도 그립구요. 어렸을 때 나를 등에 올려놓고 한손으로 팔굽혀펴기 하셨던 아버지...
내가 수모선수가 되었어야 대가 이어지는건데 목사가 되었으니... 예수쟁이들은 모두 사깃꾼이라고 하셨던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나를 들어다 패대기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