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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연구 (2):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역사적 배경

by 김성환 2008. 2. 29.

 

요한계시록은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아마도 AD 96년에 쓰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AD 92년부터 로마의 기독교 핍박은 매우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AD 65년에 네로황제에 의해 자행된 기독교인들의 핍박이 있었고 67년에는 베스파시안 황제에 의해 기독교 핍박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AD 70년에 성전을 포함한 예루살렘 도시가 로마에 의해 철저히 파괴됩니다. 이때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당하였고, 디모데도 살해당합니다.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핍박

AD 92년에 이르러 상황은 더욱 악화됩니다. 도미티안이 로마의 황제 자리에 즉위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절대권력자가 자신의 권좌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그렇다고 하지만 도미티안 황제는 특히 정서가 불안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좌를 강화하고 거대한 로마제국을 일사분란하게 통치하는 수단으로 로마제국의 모든 시민들로 하여금 황제 자신을 '주와 하나님'(Lord and God, Dominus et Deus)로 숭배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이름을 '영원한 제국'(Eternal Empire)으로, 자신의 이름은 '영원한 왕'(Everlasting King)으로 명명합니다. 로마제국과 황제의 우상화 작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모든 로마의 시민들과 권속들은 도미티안 황제의 이름으로 지어진 성전에 나아가 향을 피워 제단에 던지고 'Caesar Kurios'(Caesar is Lord) 즉 "시어저는 주다," 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사람들이 이러한 작은 예식을 행하는 한 그가 어떤 다른 종교를 갖든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종의 예배행위를 통해 도미티안 황제는 자신의 거대한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북한을 비롯하여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절대권력은 종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래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신론 문화였던 로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러한 도미티안 황제 숭배 행위는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믿는 신 외에 또 다른 한 신을 추가적으로 숭배한다고 해서 그들의 신앙양심에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에게는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시이저를 정치지도자로서 존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시이저를 '주님'으로 예배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이저를 인간으로서 존경할 수도 있지만 시이저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었습니다. 요한에게 유일한 주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목숨을 잃을 지언정 그 분 외에 다른 존재를 주로 시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절대적인 충성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시이저는 또 다른 피조인간에 불과하였습니다. 언젠가 시이저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할 때가 올 것을 요한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요한이 그의 노년에 동류 유한존재인 인간에게 머리를 숙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를 향한 숭배행위를 거부합니다. 황제와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요한의 그러한 거부 행위는 로마의 화합을 위협하는 정치적인 반역이고, '무신론자'의 행태였습니다. 요한은 다른 이들에게 선례로 남겨지면 곤란한 골치거리로 여겨집니다. 그 댓가로 요한은 밧모섬(Island of Patmos)에 유배됩니다. 그 섬은 현재 터키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10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작은 돌섬입니다. 로마정부는 밧모섬에 채석장을 만들어 정치범들을 가두고 채석 노동을 하며 일생을 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개인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사도 요한은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적은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요한계시록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언뜻 복음서에 나와 있는 진리와는 상충되는 듯 보입니다.

"때가 가까우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볼지어다, 내가 땅끝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쓰러져 가는데 과연 그것이 사실이라는 외적 증거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교회는 지하로 숨어들었습니다.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분을 떳떳이 내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예배행위는 마치 범죄행위인 듯 밀실 속에서 은밀히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흩어지고, 타협하며, 외심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사랑받는 교회의 지도자였으며 일평생을 '주님'을 위해 살았던 사도 요한은 그의 지명도 때문에 목숨만은 건졌지만 절망스럽게도 밧모섬에 갖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 채 남은 여생을 수감생활로 마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는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그러한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응답입니다. 속시원히 눈에 보이는 성과를 바라는 인간의 바램과 상식과는 달리 생생한 이미지들을 보여주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절망스러운 상황을 보는 대안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책,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주 예수여, 어디 계시나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그 분의, 그 분 방식의 답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