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하루 종일 얼바인에 있는 어느 교회의 현관과 본당에 십자가를 설치하고
영아실에 평상마루를 만드는 작업을 했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니스로 매끈하게 스프레이 된 십자가는
이 시대의 값싼 영성을 닮았다고 생각하곤 했거든.
그저 매끈하고 예쁘기만한 십자가에게서는 참기 힘든 가벼움을 느끼곤 해.
버려졌던 나무를 두 손으로 쪼개고, 자르고, 파고, 깎고, 찍고, 닦고,
못 박고, 껍질을 벗기며 세상에 하나 뿐인 십자가를 만들었어.
그런 과정을 거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 본다면
그 어느 누구도 예수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난 생각해.
작은 십자가는 현관에 걸려고 만든거야.
큰 나무 십자가 안에 작은 나무 십자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라디아서 2:20)를 표현하기 위함이지.
예배의 자리에 들어오는 자에게는 그 고백이 지불해야 할 입장료여야 하니까.
십자가는 그저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각자의 어깨에 짊어져야 할 것이라고 외치는 저 나무 십자가의 소리를
교회의 문턱을 드나드는 모든 이들이 듣게 되기를 바래.
나무를 쪼개보니 어쩜! 나무 중심에 혈흔처럼 붉은 결이 흐르고 있었어.
“아, 너는 십자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나무였구나,”라고 나무에게 말해 줬지.
그 말에 비로소 안도하는 나무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단다.
내심 땔감이 될 걸 두려워했던게지.
속으로 삭인 그 두려움이 혈흔의 결을 빚어낸 건지도 몰라.
본당에 건 십자가는 거의 사람 키 만해서 만드는 과정이
마치 나무 속에 갖힌 사람을 조각해서 끄집어내는 듯 했어.
교회는 십자가 뒤로 조명을 설치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것이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교회의 뜻대로 하고 나니 십자가는 빛이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내 편견 때문에 회피하고 있었구나 싶었어.
노을 빛이 세상을 물들이듯, 저 빛이 교회 문을 넘어 세상을 물들이길.
십자가를 설치하고, 노년의 한 여성도가 빛을 발하는 십자가 아래 기도 드리는 것을 보았어.
그 장면에 압도되어 뒷줄에 한참을 앉아 있었지.
요즘 기도가 잘 나오지 않는 난,
그 자리에 앉아 대신 노래 한줄기 마음 속으로 읊조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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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쬐이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2.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때
나 위해 고생 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때 내 맘에 큰 진리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3.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형체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십자가 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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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교회의 이름이 “새생명”이더라.
새생명!
교회가 수치가 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저 수치의 십자가가 새 생명인걸 어찌 부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