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대예배 설교준비 중.
교회에서는 집중이 되지 않아 Borders에 와서 설교 준비를 하고 있다.
내일 설교는 내가 잘만 전달한다면 전하고 나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설교다.
지난 몇 해 동안 내 의식을 사로잡고 있었던 이미지,
에덴동산과 겟세마네동산
제대로 된 설교를 준비할 때는 피가 마른다.
신경이 있는대로 곤두서고, 이 때 누가 말을 걸면 싸움이 날 태세다.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가장 여성답더라. 그것은 남성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
그러나 난 한편의 설교준비를 통해 여성의 출산 체험을 간접으로 접한다.
설교자의 고통스런 특권이리라.
이 시간이 내겐 예수님과의 경계선(Borders)이 가장 희미하게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설교란 가시적 현실과 비가시적 '하나님의 나라'의 국경선(Border)에서 서성거리며 그 나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닌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도문에서 바라본 함경북도 온성의 장면으로 내 의식은 찰나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 아름다우리만치 황폐한 곳
점심도 굶은 채, 고구마 두 조각과 복숭아 하나로 배를 채우고 '그 나라'의 일에 나의 모든 시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중,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메시지를 제대로만 전한다면 이 메시지의 산모는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