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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과 생활신앙 (한국일보 기고글)

by 김성환 2013. 1. 5.


연말에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인데 어제 나왔습니다.

<생활신앙>이란 토랜스제일장로교회에 있을 때부터 늘 생각하는 주제입니다.


(사진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신앙생활과 생활신앙

김성환 목사 (가디나장로교회)




그리 설레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 주님 이 땅에 오신 성탄의 계절인데 말입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성탄 장식과 마음을 장악하는 연말의 소비 문화는 본질에 눈길 빼앗기지 말라고 속삭이는 마취제인듯, 침착하지 않으면 강력한 시대의 이안류(Rip Current)에 마음의 알맹이를 빼앗길 것만 같습니다. 


이 모든 성탄 축제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할 교회는 비만과 동맥경화를 앓아 호스트로서의 손님 맞이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운 듯 보입니다. 잦아드는 교회의 심장 박동에 두 손 모아 가슴을 힘껏 눌러봅니다.


잔치 자리를 떠나 조용한 곳을 찾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당신이 꿈꾸셨던 교회와 우리가 만들어가는 교회 사이의 괴리가 크지요?’ 


아직 ‘예수님의 길’이 혹독한 핍박을 받던 상황에서 ‘순교자’ 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던 저스틴은 주후 154년에 <첫번째 변증>(First Apology)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에게 핍박을 완화시켜달라는 목적으로 쓴 그 책에서 저스틴은 결론부분에 마태 22:17-21을 인용합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그는 그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것, 즉 예배, 찬양, 기도와 같은 ‘영적인 영역’은 하나님께 드리겠지만 그 외 ‘다른 모든 영역’에 관해서는 로마 황제의 통치에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니 핍박을 완화해 주소서!’ 라고.


어쩌면 이것은 2,000년 교회사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 중의 하나가 아닐른지요. 이러한 성경해석으로 인해 영과 육의 영역을 따로 구분하는 이원론이 교회 안에 은연 중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겐 무의식적으로 영과 속을 구분하는 일이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된 듯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 속으로 오신 그 예수님을 따라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울타리 밖에서는 유명무실한 채 교회 벽 안에 갖힌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이유가 혹 그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우리들만의 천국”이 되어 있는 교회를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실 것만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하면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찬양하며, 교회의 유익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떠 올립니다. 그것은 일단 아름다운 마음이지만 이제는 교회가 그 수준을 넘어서야 할 때입니다. 신앙생활을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고립시켜 구분할수록 우리는 수많은 탈(Mask)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교회용 탈, 직장용 탈, 가정용 탈… 이러한 탈 바꿔쓰기가 교회 안에 많은 탈을 낳고 있습니다. 이제 주일과 월요일 사이의 보이지 않는 구분이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넘어, 예수님의 사람들이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생활이 곧 신앙이 되는 ‘생활신앙인’이 될 때 교회의 회생은 시작되고 근육이 붙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를 꿈꿀 때 제 심장은 두근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