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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별 이야기 4

by 김성환 2009. 8. 9.

10년 전에 끄적여 본 글인데 다소 유치하지만 내일 주일 아침 성경공부에 쓰려고 한다. 전도서를 공부할 차례이다.
성도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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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별 이야기 4

(기독교 역사관)


(이 글에서 역사를 연극 공연에 비유할 때 우리의 삶이란 우리에게 주어지는 역할일 뿐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맡을 역할에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연극 공연이 아니라, 창조와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한 구원과 부활, 재림,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라는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즉 하나님의 계획하신 섭리 가운데 이 역사가 가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연극 공연이라는 것이다.) 



푸른 별에서는 연극이 진행되고 있었다.  

무대 한편에선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아기들이 자신의 등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미생아에게 공연의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역사>라고 한다. 


신기하다. 관중은 없고 모두가 주인공이다. 감독과 극본이 보이지 않는다. 극본 없이 어떻게 공연이 가능한지 물어보았다. 사람마다 대답이 다르다. 

극복은 연극을 제한할 뿐이기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무 이유없이 그런 것은 애초부터 없다고 하는 이도 있으며, 극본이 없는 듯 보여도 사실은 극본이 있다고 답하는 이도 소수이지만 있다. 나는 극본이 있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말에 더욱 솔깃하지 않을 수 없어 다시 물어본다. 

"그렇다면 극본을 쓴 감독이 있다는 말입니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말이 사실일까? 

푸른 별의 공연은 혼란스럽다.

과연 무대 커텐 뒤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는 둘이다. 무대 위의 사람들은 두 개의 다른 음성의 지시에 따라 연극 공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소리는 미세한 음성이며, 한 소리는 시끄러운 확성기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대부분은 확성기의 소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지만 유심히 보니 미세한 음성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연극 공연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이상한 별이다. 


그 두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때 한줄기 바람이 길게 불어 무대의 커텐이 살짝 흩날렸다. 그 순간 잠깐이었지만 나는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커텐 뒤에서 확성기를 들고 있는 그 얼굴은... 아, 그 얼굴은 바로 사탄의 얼굴이었다. 사탄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아, 바로 저것이었구나. 음성을 변조하는 기계 뒤에 서 있는 그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때로는 달콤한 목소리로... 때로는 큰 소리로... 요구하듯... 논쟁하듯... 얼르고... 협박하고... 마치 자신이 그 연극 공연의 감독인 양,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모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소리의 지시하는 것에 따라 보이지 아니하는 그 소리의 의도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죄의 증상들이 하나 둘 기정사실화되어 간다. 


그럼 또 다른 소리는...? 미세한 그 소리는 온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리는 음성이다. 그 때, 조금 전 불었던 그 바람이 또 다시 불어온다. 미세한 그 음성이 바람에 실려 나의 귀에 살며시 들려온다. 나는 그 음성에게 물어 보았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음성은 손이 되어 한곳을 가리킨다. 그리고 2000년 전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이라 하는 곳을 바라보라 한다. 무엇이 보이는가... 투박한 십자가가 꽂혀 있다. 십자가에는 불쌍하게 생긴 한 남자가 달려 있다. 음성이 말하길 그는 '사랑'이라 한다. 


"사랑이 왜 죽어야 합니까?" 


음성은 내게 알고 싶냐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자 바람은 나에게 푸른 별의 지나간 과거와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을 알려주었다. 

무대가 새롭게 보인다.


나의 눈은 십자가에서 무대로 옮겨졌다. 무대 위의 사람들은 무대 뒤의 소리에 맞추어 분주히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연극 공연이 극본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하다. 감독의 미세한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 감독에게 반역한 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들의 공연은 주제가 없다. 있다면 감독의 지시를 듣지 못하게 함으로써 공연을 망치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 틈에서 감독의 미세한 음성에 따라 움직이는 소수의 사람들이 공연하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노라니 아, 그 공연의 주제는 창조주의 구애였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였다. 

그리고 보니 창조주는 바로 그 감독이 아닌가? 



1999년 8월 25일 수요일, 20시 4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