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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연구: 1/7 에베소교회에 주시는 말씀 (계 2:1-7)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by 김성환 2008. 4. 15.


설교문 형식으로 쓴 장문의 글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으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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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연구 (2:1-7)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에베소교회에 주시는 말씀)

 

지난 몇주 동안은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시간을 쏟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저자 요한이 쓴 또 다른 책 요한복음이 그렇듯 매우 정교하고도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글로 정리한다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 정리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이제 요한계시록 2-3장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여러분 먼저 요한계시록 2:1-7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개역개정판으로 한번, 새번역으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3장은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편지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곱 교회란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이름은 모두 그 교회들이 위치한 도시의 이름들입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라는 도시에 있는 교회이고, 사데교회는 사데라는 도시에 있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일곱교회일까요?

사실 소아시아에는 일곱 교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골로세 교회, 리스트라 교회, 더비 교회, 밀레투스 교회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일곱 교회만을 언급하는 것은 일곱이라는 숫자가 지니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일곱은 성경에서 완전수(Completeness)를 의미합니다. 예컨데 "하나님의 일곱 영"(1:5)은 문자적으로 일곱의 다른 성령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완전한 임재와 사역을 의미하는 요한의 표현기법입니다. 일곱교회란 "완전한 교회"(the complete Church)를 의미합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계시록에서 3, 4, 7, 12 등이 온전함을 의미하는 숫자인데 저마다 약간씩 다른 뉘앙스의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완전수란 대표성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곱교회에 편지를 주셨다는 것은 이 세상의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모든 교회들에게 주신 편지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곱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들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일곱교회가 지닌 이슈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교회들이 이 땅에서 겪고 갈등하는 이슈들을 총망라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교회들을 요한계시록 2-3장에 나타난 일곱교회의 상황에 비추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작업이 될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 주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왠만한 의식을 지니고 있으면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인 의미를 꿰뚫어보고, 그것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그 본질이 변질될 수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요한계시록 2-3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한계시록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작업이 우리 한국교회에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실관 (The Vision of Reality)

여기서 에베소 교회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현실관>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우리의 현실관을 변화시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은이에게 '기탄한글'이라는 한글 교재를 읽어주는데 사람 얼굴의 부위 명칭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눈, 코, 입, 귀... 사람 얼굴에서 코와 입은 하나씩이고, 눈과 귀는 두개씩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눈은 하나가 아니라 두개라는 사실이 생각해 보면 놀랍습니다. 사람의 눈은 하나일 때 Perspective를 잃게 됩니다. 한눈으로 보는 세상은 2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한쪽 눈을 가리고 보면 거리감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의 눈이 두개여서 사물을 볼 때 두 눈의 앵글의 차이가 만들어지고 그 차이가 비로소 거리감을 느끼게 합니다. 사물을 2차원이 아닌 3차원의 입체로 감지하게 되는 것은 바로 두 눈의 미세한 퍼스펙티브가 포개어질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에 와서 감사한 것 중의 하나는 제가 이중 문화 (Bi-cultural)이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를 보는 시각이 좀더 양시각 (Bi-focal)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서양)과 한국(동양)의 양쪽 문화를 접한 경험이 문화문명 전반을 보는 시각을 좀더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이러한 양시각의 관점을 우리에게 줌으로써 우리가 현실을 보는 관점이 변화되는데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한 눈으로는 이 땅의 현실을 보는 동시에 한눈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함으로써 영적 양시각을 갖게 합니다. 쉽게 말해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안경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안경'을 쓰고 보아야 현실(Real-ity)이 온전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안은 망막의 시신경에 비추어진 현실만을 보지만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보는 영안을 더하여 줍니다. 이 세상만 보아서는 온전(seeing)’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현실은 하늘의 관점과 덧포개어질 때 비로소 입체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8, 개정)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현실관이란 우리가 인생을 바라보는 안경과도 같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현실관도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하늘의 관점과 포개어지지 아니하면 불완전한 2차원적 관점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입니다.

 

한쪽 눈을 감으면 거리감을 상실하여 뛸 수도 없고, 똑바로 걸을 수도 없습니다. 두 눈의 작은 퍼스펙티브의 차이가 우리로 하여금 뛸 수 있게 하고, 똑바로 걸을 수 있게 합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현실을 바라보는 영적인 양시각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은 영적인 안과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라식 수술대 위에 실명하였던 영안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주님,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는 곧 보게 되었습니다. (눅 18:41-43a, 새번역)

 

오, 예수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서.

 

 

이제 일곱교회 가운데 첫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첫번째 교회로 언급되는 이유는 밧모섬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교회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들고 떠난 우체부가 가장 먼저 가게 될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가 첫번째 교회인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일곱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가 일곱교회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쓴 에베소서의 수신교회가 바로 이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도시의 배경

AD 96년,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시 에베소는 로마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가장 큰 도시는 로마였고, 두번째는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세번째는 시리아의 안디옥입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이곳 안디옥에서 처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우게 되지요.) 그 다음 네번째로 큰 도시가 에베소입니다. AD 96년 당시 에베소의 인구는 약 225,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에베소는 당시 명실공히 세계적인 코스모폴리탄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로스엔젤레스, 홍콩, 상해, 런던, 서울에 비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에베소는 경제중심도시였습니다. 소아시아 뿐 아니라 로마전체를 놓고 볼때도 그랬습니다. 에베소의 은행에는 막대한 자금이 유치되어 있었습니다. 아시아 서해안에서 가장 큰 항구가 바로 이곳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곳에는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져 사는 다문화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인종화된 로스엔젤레스나 다문화화되어 가는 서울 같다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되네요.)

 

에베소는 Pan Ionian Game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올림픽 다음으로 유명한 체육경기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또한 에베소에는 24,000명을 수용하는 원형극장이 있었습니다. 그레코로망(Greco-Roman) 문화의 영광이 집약된 곳입니다.

 

종교적인 면에서 볼 때, 에베소는 아르테미스라는 그리스 여신(로마인들은 아르테미스를 다이아나라고 불렀습니다.)을 어머니 신으로 섬기는 종교 중심지였습니다. 아르테미스는 생산의 여신입니다. 가슴을 드러내 놓고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는 성적 음란과 성의 여신이기도 합니다. 생산은 성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아르테미스 숭배 행위는 결과적으로 성적 음란 행위를 잉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에베소인들은 그녀를 숭배하여 성전을 짓는데 그 때 당시 그 성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였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고 합니다. 그 성전은 풋볼 구장의 두배인 10만 스퀘어 피트의 부지 위에 지어졌습니다. 100개의 대리석 돌기둥이 있었고, 기둥은 각각 55피트 높이였습니다.  

 

BC 29년에 이르러 에베소는 로마 여신 숭배의 중심지인 동시에 로마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에 순종하는 도시들에 대한 댓가로 로마는 황제숭배 신전을 짓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어느 도시가 황제 숭배 신전을 갖게 된다는 것은 로마의 문화에 대한 그 도시의 충성도와 공헌도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에베소는 그러한 특권이 여러번 주어졌습니다. BC 29년에 처음, AD 90년에 도미티안 황제 신전(나중에는 베스파시안 황제 신전으로 바뀜), 그리고 AD 190년에 헤드리안 황제 신전을 짓게 됩니다. 도미티안 황제의 신전은 8개의 돌기둥이 있었는데 기둥 하나가 자그마치 46 피트의 높이와 5피트의 지름이었다고 합니다.

 

러한 경제, 문화, 정치, 종교다원주의의 중심 도시에 그 때 당시 가장 영향력있는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에베소 교회는 사도행전에 의하면 사도 바울과 프리실라와 아굴라에 의해 개척되었습니다. 바울이 떠난 뒤, 프리실라와 아굴라가 이 교회를 맡아 양육합니다. 바울이 이 교회의 선교 전략적 위치의 중요성을 알고 나중에 돌아와 2년 반을 이곳에 머뭅니다. 사도바울이 한 교회에 머문 가장 긴 기간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지역경제에 해를 입힌다는 이유로 사도 바울은 그곳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에베소의 큰 경제 중 하나가 아르테미스/다이아나 여신의 소형 신상을 만들어 파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전도로 믿음을 가지게 되면서 더 이상 신상을 구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경제타격을 입게 된 것이지요. 신상 판매수익이 줄어들자 신상 판매 상인들을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에게 에베소 도시 밖으로 나가라고 요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주 안의 아들"이라고 부른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의 후임 목사로 세우고 떠납니다.

 

일세기 후반에 디모데는 로마에 의해 살해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의 제 3대 후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요한 목사님께서는 요한복음을 썼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시에 에베소는 크리스찬 운동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그리고 에베소로 이동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로마로 옮기게 되구요.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교회의 멤버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의탁합니다. 마리아는 요한과 함께 그 교회의 멤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에베소 교회란 얼마나 놀라운 교회입니까?

사도바울이 개척한 교회, 프리실라와 아굴라와 디모데가 양육하고, 사도 요한이 담임목사로 있었던 교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권사님으로 있었던 교회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어느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몇몇 특정 교회가 떠 오르긴 합니다.)

 

 

그런 교회에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먼저 2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요한계시록 1:9-20 말씀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첫 비전을 인용것입니다. 2:11:161:13의 인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계시록의 구조적인 문제인데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여기서 한가지만 관찰하고 넘가자면 1장에 나타난 첫번째 비전에서는 예수님께서 일곱 별(일곱 교회의 천사들을 의미, 계 1:20)을 Has, 즉 가지셨다고 묘사했는데 2:1에서는 그것을 강화하여 Hold로 바꾸었습니다. 일곱 천사들을 수중에 부리시며 교회의 삶에 적극 관심을 갖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1:13에 나타난 처음 비전에서 예수님은 “stands”였는데 2:1에서는 "walks among" 으로 바뀌었습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의미하는데(계 1:20) 일곱촛대 사이에 서 계실 뿐 아니라 걸어 다니시며 일일이 점검하시고, 관여하시는 분으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교회의 품질관리사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가 바로 교회라는 사실을 위의 두가지 관찰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 2:2에 이르러 이 유명한, 영향력 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대형 도시 교회의 교회 진단서를 제시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칭찬으로 시작하십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여기서 네 행위를 안다는 뉘앙스는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는 책망의 톤이 아닙니다. 너의 행위를 안다는 것은 너의 공헌, 실천, 성과(Achievement)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행함이 컷던 교회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자면 다양한 교회 프로그램과 사역 활동이 있었던 교회입니다. 모든 멤버들이 분주하게 제자양육, 주일 오후집회, 철야집회, 새벽집회, 수요예배, 성경공부 프로그램, 외부강사초청강연, 부흥회, 선교바자회, 교회 성장학 강의를 듣기 위해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모여드는 등등 다양한 교회 사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오해없으시길, 이러한 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좋은 취지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분주하게 일합니다.

 

"네 수고를 안다."

너의 힘들게 일함을 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는 너의 마음을 안다. 에베소 교회는 헌신하고 있고, 부지런하고, 열심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네 인내를 안다."

오랜 고난과 고통을 딛고 견딘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인내를 안다. 그들의 믿음을 위해 그들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믿음 때문에 그들에게 대적자들이 생겼습니다. 황제숭배의 압력을 인내하였고, 시이저에게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아르테미스/다이아나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하였습니다. 친구들로부터 소외되고, 사회로부터 멸시당하고, 지역사회의 고객들을 잃게 되었으며, 비지니스에도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

 

위의 사실을 3절에서 추론할 수 있습니다.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지 아니한 것을 내가 아노라."

 

놀라운 교회입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을 안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순결과 교리의 정통성을 지키는데 헌신하였습니다. 도덕과 윤리의 문제 사이에서 타협하지 않았고, 쉬운 길과 무관심의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경한 것들과 생각들이 교회 내부에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애썼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아노라. (계 2:1후반부)"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거짓 가르침을 가지고 에베소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니골라당이라고 부릅니다. (2:16)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에베소 교회가 교리의 정통성을 지키는데 헌신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분별력을 지닌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진리에 비추어보아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성숙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그들 또한 싫어하였습니다.

 

이런 에베소 교회에 무슨 부족함이 있을까요?

교회의 모습이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4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교회에 바라시는 놀라운 속내가 4절 하반부에 나타납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4)

 

천사들을 손에 쥐고 계신 분,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그 분은 교회의 참 상태를 정확히 꿰뚫고 계십니다.

에베소 교회의 모든 행위와 수고와 인내하는 아름다운 모습 이면에 에베소 교회가 중요한 것을 상실한 심각한 상임을 지적하십니다.

 

첫사랑을 버렸느니라.”

 

왜 예수님께서는 다소 감상적으로 들리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볼 수록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겪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사랑

첫사랑이란 생각해 보면 지금껏 지속적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한번도 사랑을 시작해 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는 첫사랑논할 수 없겠지요.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이영애에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는 대사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사랑이 변질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첫사랑은 예수님께서 처음 우리의 삶에 들어오셨을 때 가졌던 설레임입니다. 수양회의 마지막 날 밤 울부짖으며 만났던 예수님, 병상의 절망스런 순간에 무릎 꿇으며 만났던 예수님, 어느 공허한 밤, 말씀을 읽다가 문득 그 분의 은혜에 깊이 감동하여 헌신하기로 다짐했던 예수님, 그 예수님께 가졌던 첫사랑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문제는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정통성은 있었지만 더 이상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본질 때문에 본질을 희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인들 간의 친밀한 교제는 있었을지 모르나 예수님과의 친밀함과 애정이 사라졌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종종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하시곤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저버리고 다른 연인들과 사랑을 나눕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다룬 전형적인 책이 호세아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교회가 주님과의 첫사랑을 상실할 때 물질주의, 배금주의, 권력욕, 안락, 엔터테인먼트, 경제적 안정 등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주님에 대한 헌신의 외적인 모습은 각종 다양한 교회 행사를 통해 유지시켜 가지만 더 이상 하나님과 실질적이고도 친밀한 사랑의 관계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구약의 그러한 신랑/신부 비유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신랑되시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한계시록의 주제를 달리 정리하자면 예수님의 신부의 합당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밝히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결혼교실'인 셈이지요. 요한계시록은 마지막에 예수님과 교회의 결혼잔치로 끝맺고 있습니다.(계 19:9) 이것은 성경 전체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소아시아의 최고 대형교회였던 에베소교회에 주시는 예수님의 책망이 이것입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러분, 모두 배우자와의 첫사랑의 기억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돌이켜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었지만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그 순간을.

 

첫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즐겁게 시간을 냅니다. 모든 시간을 그와 보내기 위해 애씁니다.  

첫사랑은 그에게 귀기울이며, 어떻게 하면 그를 기쁘게 할까 골몰하는 사랑입니다.

 

첫사랑은 절대 "나 지금 바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러분은 처음 예수님과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떤 기억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고등학교 때 밤새도록 성경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 숙제하는 시간도 아깝고, 밥먹는 시간도 아까웠습니다. 성경책을 읽는 그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태복음을 읽으며 마지막 수난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처음 읽으며 뭔가 심각한 지구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에 두려움을 느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교회 가는 것이 가장 즐거웠습니다. 찬송부르는 것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실로암, 나는 순례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작은 불꽃 하나가, 나 가진 재물 없지만..."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나 주님, 저는 지금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가대 봉사하고 있는데요? 집사인데요? 장로직분을 받았는데요? 신학교에 가서 목사까지 되었는데요?

"알고 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나 주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십일조를 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세금보고도 정직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알고 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나 주님, 저는 모태신앙이며, 조상 가운데 순교자도 있고, 4대째 목회자 집안이며, 새벽기도에 매일 참석하고, 수요예배도 참석하고 있지 않습니까? 술도 끊었고, 담배도 끊었지 않습니까? 

"알고 있다. 그러나 너는 첫사랑의 그 친밀함, 열정, 관심, 설레임, 감격을 버렸느니라."

                       

 

첫사랑의 상실이 이토록 심각한 영적인 문제라면 어떻게 이런 첫사랑의 상실이 일어나게 되는 걸까요?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 교회에 나오게 되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물론 다른 불순한 동기로 나오는 분들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나고 나면 교회 안에서 인정받고 점차 지도자의 직분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서 교회 내부의 사정에 깊이 관여하게 되고 교회 정치와 정책 결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리고 서서히 교회의 본질은 상실한채 그렇게 그렇게 자신이 교회 운영에 관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데서 야릇한 쾌감을 느끼게 되고, 생활신앙이 아닌 신앙생활에 안주하며, 메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그렇게 첫사랑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것은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죽고 못살아 결혼하지만 먹고 사는데 바빠서 마누라가 파마를 했는지, 아이들이 3학년인지 4학년인지 헷갈리고, 주말이면 눕고만 싶고, 가족이 짐처럼 느껴지고, 남편은 무능한 식충이로 보이고, 아내는 살덩이 아줌마 같이 보이면서 그렇게 그렇게 첫사랑을 상실하게 됩니다.

 

 

첫사랑은 알지 못하는 사이 다른 것으로 대치되기 마련입니다.

비본질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배우자는 바람을 피우고, 교인들은 예수님이 아닌 교회놀이에 도취하게 됩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계 2:5)

회개하라는 말씀은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우리의 현상태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다른 신들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일을 숭배했으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성공과 경제 안정을 더욱 중요한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계 2:5)

처음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했던 것들을 기억하고 다시 하라는 것입니다.

결혼 관계에서 로맨스를 회복하는 방법도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신혼여행가서 찍었던 "나 잡아봐라" 사진들을 다시 꺼내 보는 것입니다. 외식도 하고, 영화도 보고, 사랑도 고백하고, 덕수궁 돌담길도 다시 찾아가 거닐어 보는 것입니다. 장미도 사고, 연애편지도 쓰고, 으슥한데 차 세워놓고 다시 뽀뽀도 해 보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너는 처음에 시시때때로 말씀 묵상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니?

너는 처음에 서투르나마 찬양하는 것을 그토록 즐기지 않았니?

너는 처음에 너무도 순수하게 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니?

너는 처음에 기도일기를 쓰는데서 기쁨을 느꼈고, 신앙도서를 읽는데서 성장하는 뿌듯함을 느끼지 않았니?

너는 처음에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애통해 하며 전도에 힘쓰지 않았니?

너는 처음에 너 자신의 삶을 스스로만의 힘으로는 지탱할 수 없음을 알고 나에게 온전히 삶을 의탁하곤 하지 않았니?

 

처음 그 사랑을 회복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외에 그 무엇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 외에 그 무엇도 예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금촛대를 옮기겠다."

 

그 분은 교회의 주인이시며 그럴 권리가 있으신 분이시기에 이 말씀이 무섭습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두려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첫사랑의 그 초심을 상실하여 실제로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교회의 촛대가 옮겨졌습니까? 교회로서의 외적인 모양은 갖추고 있는데 더 이상 어둠 가운데 빛을 발하지 못하는 있으나마나한 촛대들이 우리 주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규모나 조직이나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상실하면 그 교회는 꺼진 촛대입니다.

교회 건물의 규모와 막강한 재정상태와 많은 등록 교인들의 수와 최신 유행 교회 프로그램 등을 자랑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교회가 발하는 빛은 예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연료로 밝혀진다는 사실을.

 

첫사랑을 상실한 예배는 생명없는 형식으로 전락하며

첫사랑을 상실한 인내란 마지 못한 시간 떼우기 밖에 아니며

첫사랑을 상실한 교리의 정통성이란 냉소적인 율법주의로 변질되고 맙니다.

 

 

약속

예수님께서는 Overcome하는 자, 즉 이기는 자, 다시 말해 기억하고,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 2:7)

 

창세기 앞부분에 잠깐 조역으로 등장하였다가 무대 뒤로 사라진 생명나무가 성경 마지막 책에서 주연으로 재등장합니다. (생명나무의 깊은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살 떨리는 감동입니다. 지금은 '고종의 아침'에서 이 글을 타이프하고 있는데 팔뚝도 아파오고  배도 고파서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간단히 몇마디만 언급하겠습니다.

생명나무는 성경의 첫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에 나옵니다.

그 나무는 첫창조의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등장할 때는 새창조 하나님의 도시 새 예루살렘 중앙에 있습니다.

첫 창조에서 죄 때문에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막히고 인간들은 짐승의 가죽을(창 3:21) 뒤집어 쓰고 쫓겨납니다. 

두번째 새 창조에서는 인간의 가죽을 입고(요 1:14)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또 다른 어린 양이 피를 흘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립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최대 복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이었음을 밝히고 계십니다.

랍고 놀라워 전율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첫사랑을 회복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내용은 생명나무 다시 말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아는 성경 최고의 비밀 가운데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하노라." (창 3:22)

 

 

성경 앞부분의 이 최대 비극의 이야기 앞에 우리는 절망하고 섭섭함을 금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치 못했던 대안을 예비해 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대안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생명 열매,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자는 정녕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성찬식의 의미는 생명나무 회복예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거 생각하면 난 눈물납니다.

모든 지구인들이 이 사실 알아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 2:7, 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