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 실려 한 주간 먼 곳에 다녀 온 나는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에 사로잡혀 쓸쓸한 나만의 공방에 갈 엄두를 못내고 있다.
지난 5년간, 주일 새벽 다섯시면 어김없이 찾아와 설교 원고를
마지막으로 다듬던 이 커피숍을 지난 3개월간 난 차마 찾아올 수 없었다.
김유신의 말처럼 나의 낡은 차는 오늘 이곳으로 나를 몰고 와 앉으라 한다.
몇 자라도 적지 않으면 밀물처럼 흐르는 이 그리움이
내 안에서 벗겨낼 수 없이 고체화될 것 같아… 몇 자 적는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한복음 6장)"
오병이어의 대형 집회 후 베드로가 주님과 나누었던 이 대화는
늘 쓸쓸한 나를 눈물 짓게 만드는 힘이 된다.
베드로의 이 고백에 예수님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속으로 삭이셨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누군가 나를 떠난다는 것처럼 견디기 힘든 일이 있을까?
외롭지만 머무는 자,
그로 하여금 그 분 곁에 머물게 하는 힘은 그 분께 있는 영생의 말씀이었다고 한다.
그치지 않는 생명의 메시지…
며칠간 많은 ‘말씀’들이 있었다.
뜨거운 햇빛 아래 노동과 수면 부족에 지친 나의 고막은 그 말씀들을 향해 떠 있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순전히, 나의 지친 심신 때문에 최첨단의 음향 시스템을 통해 전해지는 귀한
내용들은 나의 고막 너머로 많이 주입되지 못했지만, 오랜 지병인 ‘성냥팔이 소녀 병’을 앓고
있는 내가 주목한 것은 늘 그렇듯 주변(Margin)이었다.
하야오 미야자키의 만화 영화에 나올 듯한 시카고의 파아란 하늘과 뭉개구름,
에드만 채플 앞 화단 속에서 특송을 불러 준 방울새와 팔락이며 바디 워십에 여념 없던
호랑나비 두쌍, “나는 아픔이요” 라고 외치는 듯 붉은 조끼를 입은 간사들의 여간해서 쉽게
들키지 않는 헌신이 내 시선에 포착되었을 때, 나는 여러번 먼 거리에 서서 먹먹함을
느끼는 것으로 그들에게 감사를 전했더랬다.
창조된지 족히 6000년은 더 되었을 청명한 시카고 밤 하늘의 수 많은 별들,
그리고 7월의 신록을 나부끼는 나무들,
아, 나무들!, 그들은 도끼와 망치를 들지 아니한 나를 향해 용서한다는 듯,
경계하지 않는 몸짓으로 다정히 목수인 내게 손 흔들어 주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살아가는 피조 동료들과의 대화는 같은 모국어를 공유하는 동질성
때문에 더 더욱 애틋했고, <OPPORTUNITY> 라고 희미하게 쓰인 깃발이 되어 버린
“학위(Degree)”를 얻기 위해 타국어로 힘겹게 공부하는 유학생 남편을 뒷바라지 하는
30대 중,후반 주부들의 소외감과 피곤함의 정도(degree) 가 느껴져 숙연했다.
앞서 걷는 남편 뒤를 따라 스트롤러를 밀고 예배실로 들어가는 그녀들의 뒷 모습에서
얼떨결 붙들려 십자가 끌고 간 구레네 사람 시몬을 본다.
외로운 타국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남편을 돌보는 그들의 이름없는 “살림살이”가 어느 명문대
박사학위 못지 않은 Degree 가 되어 그들 영성에 깊이를 인증하는 세가닥 금줄이기를…
그리고 마지막 날 새벽 미명에 어김없이 새롭게 밝아오는 하늘!
이것이 나로 하여금 코스타에 머물게 한 “영생의 말씀”이요 주강사였다.
찬란했던 지난 5일의 코스타에서의 시간은
눈부신 <하나님의 나라>의 일견(Glimpse)을 보고 돌아 온 시간이었다.
감사함이 깊은 곳으로부터 밀물처럼 내 온 몸을 적시며 차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