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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 요한복음

요한과 대화하다

by 김성환 2010. 9. 12.

매일 매일 사도 요한과 대화 나누고 있다.  
그는 나의 좋은 친구다. 
그로부터 예수님에 대해 듣고 내가 알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조율해 나가는 중이다. 
그는 헬라어로 말하고 나는 그의 말을 해석하느라 처음 미국와서 영어 공부 하듯이 원어와 씨름하고 있다. 

Karl Barth 가 그렇게 말했다지.
"Tell me your christology, and I will tell you who you are."
(당신이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내게 알려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 
"예수가 누구인가?"
이 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 세상에 저마다 태어난 것이 아닐까? 
그 질문 앞에 서면 다른 모든 질문은 사소한 것이 되고 만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하나님의 자기 나타내심'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인간의 몸이 되셨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거울로 보듯 희미했던 하나님의 참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가 예수 안에서 드디어 충족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 2, 14을 자유롭게 번역하다.)

우리에게 보인바 되기 위해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셨던 주님께서 그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십자가 사건은 영적인 핵분열의 사건이 아닐까요?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던 날, 오후 세시에 어둠이 임하였다는 그 표현을 이해할만도 합니다. 원형 관계(Arche Relationship)의 단절이 발생하는 순간 우주라도 경련하며 그 빛을 잃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계속해서 요한복음 초반에 "아직 나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요 2:4, 7:30, 8:20)고 하신 주님께서 드디어 "나의 때가 되었다"(요 12:23, 17:1)고 하신 것은 십자가 지실 것을 암시하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목적지로 삼고 한마리 독수리가 수직 하강하듯,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셔서 하나님이 아니신 살덩이(사르크스)가 되셨고, 그 하강 여행의 가장 낮은 목적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신 그 깊은 의미를 생각할 때마다 진하게도 서글픈 뭉클함이 내 영을 휩쌉니다. 
 
모든 설교의 결론이 일상에서의 적용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설교자의 주장은 구태의연해 보입니다. 
설교의 진정한 끝맺음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신비 앞에 할말을 잃고 경외감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설교의 근본적인 지향점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예수를 바로 알면 그 자체로 인해 자연스레 삶이 변화할 거란 생각입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용기를 얻습니다.  
나 같은 죄인조차 친구라 하시는 주님의 한 없이 넓은 팔에 차마 안기지는 못하고 무릎을 꿇습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에 묘사된 둘째 아들처럼 말입니다. 

내 고향은 어디일까요? 
이곳 롱 아일랜드에서의 광야생활을 접고 다시 길을 떠나야 할 때가 오겠지요. 
그러나 어느 곳에 살게 되든지 지향하는 고향은 하나님의 품(Bosom of the Father)이 될 것입니다. 
고향이라지만 제대로 가 본적인 없는 나는 그곳을 모릅니다. 
다만 그곳으로부터 오신 분으로부터 고향 소식을 들을 뿐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요 1:18 새번역)

요한에게 길을 물으니 예수님을 가리키고 예수님께 길을 물으니 아버지를 가리키시는데 당신이 곧 길이며 목적지라 하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시며...